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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로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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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맥길 왕은 궁전의 상부에 위치한 아늑한 집회장에 앉아 있었다. 사적인 용무를 처리할 때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왕은 나무조각이 새겨진 목조 왕좌에 앉아 눈 앞에 서있는 네 명의 자식을 마주했다. 첫째 왕자 캔드릭. 스물 다섯의 나이에 훌륭한 실버 전사이자 진정한 신사. 형제들 중 맥길 왕을 가장 많이 닮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맥길 왕이 오래 전 마음속에서 지운 옛 연인과의 사이에서 둔 자식이었다. 왕은 캔드릭을 나머지 자식들과 함께 키웠다. 처음에는 왕비가 반대하고 나섰지만 캔드릭을 후계에서 배제시키는 조건으로 이내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왕은 늘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맥길 왕이 아는 한 캔드릭이야 말로 왕위에 가장 적합했고 의심의 여지없이 왕위를 넘겨주고픈 자식이었다. 왕국의 후계자로 캔드릭보다 나은 적임자는 없었다.

캔드릭 옆에는 그와 완벽한 대비를 이루는 둘째 왕자가 서 있었다. 둘째라고는 하지만 그야말로 왕과 왕비의 혈통을 물려받은 적자들 중에서도 장자였다. 스물 셋. 왜소하고 마른 뺨과 한곳에 시선을 오래 두지 못하는 갈색 눈을 가진 개리스 왕자. 성격 또한 첫째 왕자와 정 반대였다. 캔드릭 왕자가 지니지 않은 천성은 모두 개리스 왕자의 몫이었다. 캔드릭 왕자는 솔직했지만 개리스 왕자는 늘 생각을 숨겼다. 캔드릭 왕자는 훌륭하고 고귀한 품성을 지녔지만 개리스 왕자는 불성실하고 교만했다. 맥길 왕은 자신의 핏줄을 미워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개리스 왕자의 천성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의 소년기를 지켜보며 이마저도 포기했다. 왕은 개리스 왕자의 천성이 그의 운명이라고 판단 내렸다. 안 좋은 의미에서 개리스 왕자는 계략적이었고 권력에 굶주려 하는 만큼 야심이 넘쳤다. 더욱이 개리스 왕자는 여성에게는 애정을 품지 못하고 여럿의 동성 애인을 사귀었다. 맥길 왕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이 일로 왕자를 비난하진 않았다. 오히려 왕이 비난한 건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그의 사악함과 교활한 천성이었다.

개리스 왕자 옆에는 왕의 둘째 여식 그웬돌린 공주가 서 있었다. 이제 막 열여섯이 된 공주는 맥길 왕이 지금껏 본 그 어느 소녀보다 아름다웠고 더욱이 외모보다도 빼어난 천성을 지녔다. 공주는 상냥하고 자비로우며 정직했고 맥길 왕이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숙녀였다. 이련 면에서 공주는 캔드릭 왕자와 닮아 있었다. 공주의 눈빛에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애정이 충만했고 시선에서는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 느껴졌다. 맥길 왕은 그 어느 왕자 보다 그웬돌린 공주가 자랑스러웠다.

공주의 옆은 맥길 왕의 막내 리스 왕자가 지키고 있었다. 얼마 전 열네 살 성인이 됐고, 긍지와 기백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리스 왕자가 왕의 부대에 선출되기까지의 과정을 맥길 왕은 흐뭇하게 지켜봤다. 맥길 왕은 리스 왕자의 앞날을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식들 중 가장 빼어난 아들로서 훗날의 훌륭한 지도자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일렀다. 아직 왕이 되기엔 한참 어리고 배워야 할게 많았다.

눈 앞에 서있는 왕자 셋과 공주 한 명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자니 왕의 마음엔 만감이 교차했다. 자부심과 실망감이 교차했다. 자식 두 명이 이 자리에 불참한 사실에 한편으론 화가 나고 신경 쓰였다. 가장 연장자인 첫째 루안나 공주는 물론 결혼식 준비에 열중해야 했고 서부 왕국으로 시집을 가기 때문에 오늘의 후계자 선임 자리에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열여 덜, 고드프리 왕자는 불참했다. 왕은 이에 대한 모욕감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고드프리 왕자는 어릴 적부터 왕권을 존중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왕자가 후계에도 관심이 없고 왕위 후보감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왕이 제일 실망한 건 바로 고드프리 왕자가 이 모든걸 뒤로하고 술집에서 비열한 친구들과 어울려 술로 인생을 허비하고 이로써 왕족에게 전에 없던 수치심과 불명예를 안겨주는 왕자의 행실이었다. 왕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이나 술로 보내는 태만한 생활을 즐겼다. 고드프리 왕자의 불참에 왕은 한편으론 안도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허나 실상은 왕도 이미 짐작했던 일이었기에 아침 일찍 술집으로 사람들을 보내 왕자를 데려오라 미리 명해뒀다. 맥길 왕은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들의 당도만을 기다렸다.

순간 왕자들과 공주가 일제히 뒤를 돌아봤다. 흐트러진 모습의 고드프리 왕자가 고약한 술 냄새를 풍기며 덥수룩한 얼굴에 옷을 반쯤 입은 형상으로 서 있었다. 고드프리 왕자는 형제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건방진 모습이었다. 늘 예외 없이.

“아버지, 안녕하세요. 제가 볼거리를 놓쳤나요?”

“형제들 옆으로 가서 조용히 있거라. 그렇지 않으면 하는 수 없이 일반 수용자들과 마찬가지로 널 수용소에 가두는 수밖에 없구나. 삼일 간 식사도 없고 술도 아주 조금만 허락하겠다.”

교만함을 드러내며 고드프리 왕자가 왕을 노려봤다. 왕은 그의 눈빛 속 어딘가에 깊이 내제하고 있는 힘을 감지했다. 고드프리 왕자의 천성을 대변하는 힘. 언젠가 고드프리 왕자를 바르게 이끌어줄 뭐라 설명하기 힘든 광채였다. 만약 왕자가 자신의 인품을 다스릴 수만 있게 된다면 말이다.

반항은 짧게 끝났다. 10초 정도 왕을 주시했던 왕자는 결국 수긍한 채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형제들에게 향했다.

맥길 왕은 눈 앞의 다섯 자식을 살펴봤다. 사생아, 동성애자, 술주정뱅이, 딸, 막내아들. 오묘한 조합이었다. 이들 모두 자신의 혈육이란 게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맥길 왕은 오늘, 첫째 공주의 결혼식 날, 여기 서있는 자식들 중에서 후계를 골라야 하는 과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런 부조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전부 쓸모 없는 짓이었다. 맥길 왕은 현재 전성기에 있었고 앞으로도 30년은 족히 왕권을 장악하고도 남았다.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하든 적어도 향후 몇 십 년 뒤에서야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후계를 정하는 전통에 맥길 왕은 진절머리가 났다. 선대 왕들에겐 그 시기가 적절하게 맞아떨어졌을지 몰라도 지금은 후계를 임명할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왕은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모두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알다시피 오늘은 내게 후계 선택의 과업이 주어진 첫째 공주의 혼례 날이다. 후계자는 이 왕국을 다스리게 된다. 내가 죽는다면 가장 왕국을 잘 다스릴 적임자는 바로 너희들의 어머니다. 그러나 왕국의 법은 오직 왕의 자식만이 왕권을 계승하도록 명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왕은 잠시 숨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무거운 침묵이 공간을 메웠고 자식들 각자의 기대감이 전해졌다. 자식들의 눈빛에서 각각 상이한 속마음이 드러났다. 사생아의 눈빛은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걸 수긍하듯 침착했다. 반면 동성애자의 눈빛은 마치 당연히 자신이 지목되리라는 기대감과 함께 야망으로 이글거렸다. 술주정뱅이는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듯 창 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공주는 애정 어린 눈으로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후계 논의 대상이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상황과 상관없이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막내 왕자도 공주와 마찬가지였다.

“캔드릭, 난 널 언제나 다른 자식들과 똑같이 여겼다. 그러나 왕국의 법에 따라 적자가 아닌 자식에겐 왕위를 물려줄 수 없구나.”

캔드릭이 허리를 숙였다.

“폐하, 그렇게 하시길 바라옵니다. 전 지금의 상황에 만족합니다. 이 일로 폐하께 근심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맥길 왕의 마음이 아파왔다. 왕자의 말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고 이에 더더욱 캔드릭 왕자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싶었다.

“이제 네 명이 남았구나. 리스, 넌 이제껏 내가 본 중에 가장 훌륭한 청년이야. 그러나 후계 논의의 대상이 되기엔 아직 너무 어리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리스왕자가 허리를 굽혀 예의를 갖췄다.

“고드프리, 넌 세 명의 적자 중 하나다. 그러나 넌 술집에서 타락을 일삼으며 인생을 낭비하는 삶을 택했지. 넌 가질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다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모든걸 내쳤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실의가 있다면 그건 바로 네가 되겠지.”

고드프리 왕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럼 제 볼일은 더 이상 없는 거죠. 다시 술집이나 가야겠어요, 그래도 되겠죠, 아버지?”

성급히 모욕적인 인사를 건넨 고드프리 왕자가 몸을 돌려 집회실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돌아오거라!”

왕이 호통쳤다.

“당장!”

고드프리 왕자는 맥길 왕을 무시한 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집회실 문을 열어보니 문 밖에 경비병 두 명이 보였다.

영문을 모르는 경비원들이 노여움에 가득 찬 맥길 왕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러나 고드프리 왕자는 아랑곳 않고 경비원들을 지나 복도로 걸어갔다.

“왕자를 억류하라!”

왕이 소리질렀다.

“잡아서 왕비 눈에 뛰지 않게 가두거라. 공주의 결혼식에 저 녀석까지 제 어미를 신경 쓰게 만드는 꼴은 못 보겠구나.”

“네, 폐하.”

경비병들은 문을 닫고 재빨리 왕자에게 뛰어갔다.

얼굴이 붉어진 왕은 진정하기 위해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수천 번도 넘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고드프리 같은 자식을 얻었는지 의문을 품었다.

왕은 다시 남은 자식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명 모두 침묵 속에서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은 크게 숨을 쉬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두 사람 남았구나. 이 둘 중에서 후계자를 지목하겠다.”

왕은 공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웬돌린, 네가 지목됐다.”

왕을 제외한 모두가 경악했다. 자식들 모두가,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웬돌린 공주가 가장 충격 받았다.

“정확하게 말씀하신 건가요, 폐하?”

개리스 왕자가 재차 확인했다.

“그웰돌린이라고 말씀하신 건가요?”

“폐하, 영광스럽습니다.”

그웬돌린 공주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따를 수가 없어요. 전 여자잖아요.”

“그렇긴 하지, 맥길 왕가에서 여자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일은 없었지. 그러나 이제는 전통을 바꿀 때도 됐다는 판단이 섰구나. 그웬돌린, 넌 내가 지금껏 봐온 그 어느 소녀보다 마음과 정신이 훌륭하단다. 아직 왕위에 오르긴 젊지만, 신의 가호가 있다면 이 아비가 그리 빨리 죽진 않을 거다. 그리고 네가 왕위에 오를 즈음이면 충분히 왕국을 다스릴 만큼 현명해져 있을 거다. 왕국은 네 소유가 될 거다.”

“그렇지만 폐하!”

언성을 높인 개리스 왕자의 얼굴은 이미 잿빛이었다.

“저야말로 적자 중 장자입니다! 언제나 맥길 가문에선 장자가 왕권을 물려 받았습니다.”

“왕의 결정이다.”

맥길 왕이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전통도 짐이 좌우한다.”

“그러지만 불공평해요.”

개리스 왕자가 투덜대는 말투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제가 바로 왕이 돼야 한다고요. 제 여동생이 아니라. 여자는 안돼요!”

“입을 다물라!”

결국 왕은 분노에 떨며 고함을 질렀다.

“감히 내 결정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이냐?”

“제가 계집애한테 밀리다니요? 저를 그 정도로 하찮게 보신 겁니까?”

“이미 결정을 내렸다. 존중하도록 하거라. 다른 모든 결정들에 그랬듯이 순순히 수긍하거라. 이제 모두 자리를 떠도 좋다.”

자식들 모두가 왕에게 예의를 차린 뒤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그러나 개리스 왕자만이 나가지 않고 문 앞에서 멈췄다. 도저히 자리를 떠날 수가 없는 모양새였다.

왕자는 다시 돌아와 맥길 왕과 독대했다.

개리스 왕자의 얼굴엔 실망감이 가득했다. 분명 오늘 후계자로 지명되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왕자는 절실하게 그 자리를 탐냈다. 맥길 왕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개리스 왕자가 후계자로 지명되지 못한 결정적 이유였다.

“왜 절 미워하시는 거죠, 폐하?”

“미워하지 않는다. 단지 네가 왕위를 계승할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그것이야 말로 네가 갈망하는 것이니까.”

개리스 왕자의 얼굴이 검붉게 물들었다. 맥길 왕은 개리스 왕자의 천성을 확실하게 일깨워주었다. 왕자의 눈빛에서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증오심이 왕을 향해 이글거리고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아무 말도 없이 사력을 다해 문 밖을 나갔고 덕분에 큰 소리를 내며 문이 쾅 닫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맥길 왕은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개리스 왕자가 자신을 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자신을 향한 아들의 증오심이 적들의 증오심보다 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르곤의 암시가 떠올랐다. 가까이에 있는 위협.

그 위협이 이렇게까지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단 말인가?

제 6장

토르는 죽을 힘을 다해 드넓은 훈련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바짝 쫓아오는 보초병들의 발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경비병들은 무더운 날씨 속에서 흙먼지가 가득한 운동장을 달리며 토르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토르의 시야에 선발대원들이 들어왔다. 토르보다 약간 더 나이가 많고 힘이 세다는 것 외엔 별다를 게 없는 수십 명의 소년들이었다. 이들은 훈련과 함께 다양한 대형을 이뤄 심사를 받는 중이었다. 일부는 활을 쐈고 일부는 창을 던졌으며 일부는 작살을 잡는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목표물들이 꽤 떨어진 거리에 있었음에도 거의 모두가 완벽하게 명중시켰다. 이들이 바로 토르의 경쟁자들이었고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 사이로 진짜 전사들이 있었다. 실버 대원들이 넓게 반원을 그리며 선발대원의 몸짓을 하나하나 주시했다. 평가가 한창이었다. 최종 선택을 받을 이들과 집으로 돌려보낼 후보들을 엄선중이었다.

토르야말로 자신의 진가를 알려 그들의 눈에 들어야 했다. 곧 보초병들이 눈앞에 닥칠게 뻔했고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실버 대원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초조해진 마음을 안고 운동장 정 중앙으로 황급히 뛰어갔고 절대 집으로 돌려보내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전속력으로 운동장에 돌진하는 토르의 모습이 보였다. 몇몇 선발대원들이 아예 동작을 멈추고 토르에게 시선을 고정했고, 일부 실버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르는 자신에게 주목된 모두의 시선을 느꼈다. 모두들 당황한 얼굴로 도대체 누구길래 보초병 세 명을 달고 운동장 한가운데로 돌진하는지 의문을 품었다. 토르가 실버에게 심어주고 싶은 첫인상과는 정 반대였다. 평생토록 왕의 부대에 선발되기를 꿈꿔 왔지만 이런 상황을 그려본 적은 없었다.

달리는 내내 당장 뭘 할지 고민이 가득했지만 곧 이러한 생각도 의미가 없어졌다. 거구의 한 선발대원이 돋보이고 싶은 욕심에 토르를 제압하려 앞으로 나섰다. 장대 같이 큰 키에 근육으로 똘똘 뭉친 소년은 토르보다 몸짓이 두 배는 족히 더 컸다. 소년은 목검을 치켜들고 토르 앞을 막아 섰다. 토르는 자신을 꺾으려는 소년의 굳은 결심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토르를 제압해 이득을 보려는 속셈이었다.

이에 토르는 분개할 수 밖에 없었다. 토르는 소년에게 아무런 불만도 없었고 소년이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구의 소년은 가산 점을 챙기기 위해 토르에게 싸움을 걸고 있었다.

거구의 소년과 가까워질수록 그의 체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뚝 서서 토르를 노려보는 얼굴 위로는 두껍고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까지 덮여 있었고 그 누구보다 크고 뚜렷한 사각 턱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때려봐야 작은 상처 하나 생기지 않을 것 같은 몸이었다.

목검을 쥔 거구의 소년이 토르에게 돌진했고 당장 수를 쓰지 않으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반사적으로 새총을 꺼내 돌을 넣고 잡아당겨 소년의 손을 조준했다. 하늘 위로 높이 치켜든 검으로 토르를 내리치려는 순간 던져진 돌멩이가 목검을 쥔 손을 정확히 명중했다. 목검은 공중으로 날아갔고 소년은 손을 안절부절하며 비명을 질렀다.

토르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이 틈을 타 공격에 나섰다. 공중으로 뛰어올라 두 발로 그의 가슴을 타격했다. 하지만 떡갈나무를 찬 건지 헷갈릴 정도로 소년의 가슴은 단단했다. 토르가 소년 앞에 착지하는 동안 소년은 겨우 한두 걸음 뒷걸음친 게 전부였다.

‘조짐이 좋이 않아,’ 귓가에 맴도는 소리를 들으며 토르는 쿵 하고 착지했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소년의 그새 선제 공격을 가했다. 허리를 아래로 굽힌 소년은 토르의 등을 잡아 던져버렸고 덕분에 토르는 바닥에 얼굴을 박으며 나가떨어졌다.

순식간에 두 사람 주위를 에워싼 소년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토르는 굴욕감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토르가 다시 일어서려 몸을 뒤집었지만 거구의 소년이 또 한발 빨랐다. 이미 토르의 몸에 올라타 옴짝달싹 못하게 제압한 후였다. 토르가 의식하기도 전에 싸움은 이미 레슬링으로 번져있었고 사지를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무게에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나머지 소년들도 주위로 모여들었다. 토르의 귓가에 그들의 환호성이 나지막이 들렸다. 모두가 열광적으로 혈투를 외쳐댔다. 소년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토르를 내려봤고 치켜세운 양쪽 엄지손가락을 토르의 두 눈 위로 서서히 내렸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구의 소년은 정말 토르를 헤치려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선발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인 걸까?

토르는 막판에 가까스로 얼굴을 돌려 손가락을 피했고 소년의 두 엄지 손가락은 그대로 땅 위에 내리 꽂혔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토르는 소년의 몸을 빠져 나왔다.

토르는 몸을 일으켜 세웠고, 거구의 소년도 마찬가지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소년이 있는 힘껏 토르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다행히 찰나의 순간으로 주먹을 피할 수 있었다. 토르의 얼굴에 바람이 지나갔고 그 강도로 보아 아마 얼굴을 맞았으면 턱이 아작 나고도 남았을 것이 뻔했다. 토르는 가까이 다가가 소년의 복부를 주먹으로 강타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무를 향해 주먹질을 한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토르가 주먹을 떼기도 전에 소년이 팔꿈치로 토르의 얼굴을 내리쳤다.

엄청난 타격에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쳤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귀가 윙윙 울려댔다.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리는 동안 소년은 발로 토르의 가슴팍을 가격했다. 토르는 뒤로 날아갔고 바닥에 등뒤로 쓰러졌다. 지켜보던 소년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눈앞이 빙빙 돌았고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거구의 소년이 다시 한번 토르를 발로 차고 얼굴에 주먹을 날려 토르는 바닥에 그대로 죽은 듯이 쓰러졌다.

그렇게 누운 채로 나지막이 귓가를 스치는 소년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코에서 흐르는 짭짤한 피비린내와 얼굴에 전해지는 타격을 있는 그대로 느꼈다. 고통으로 흐느꼈다. 시선을 올려보니 거구의 소년은 이미 등을 돌린 후였다. 소년은 승리를 만끽하며 그들의 무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소년의 등치가 너무 커서 싸워봐야 승산이 없었고 더 이상 처벌당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한곳에서 토르를 다그쳤다. 이렇게 질 수 없다고. 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무너질 수 없다고.

‘포기하지마. 일어나. 일어나!’

어찌된 영문인지 토르는 기운을 차렸다. 신음을 참으며 상체를 일으킨 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무릎에 체중을 실어 천천히 두 발로 일어섰다. 토르는 다시 소년과 얼굴을 마주했다. 피가 흘렀고 부어터진 두 눈 덕에 앞을 보기 힘들었지만 거친 숨을 가누며 주먹을 들여 올렸다.

거구의 소년이 뒤를 돌아 토르를 노려봤다.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죽은 듯이 쓰러져 있지 그랬어, 꼬맹아.”

소년이 토르를 위협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만!”

어디선가 누군가가 소리쳤다.

“엘덴, 물러서!”

실버 전사 한 명이 그 둘 사이에 나섰다. 전사는 엘덴의 팔꿈치를 잡아 토르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전사가 나서자 군중이 조용해졌다. 한눈에 봐도 신분이 꽤 높아 보였다.

전사의 등장에 놀란 토르가 고개를 들었다. 20대 정도의 나이에 떡 벌어진 어깨, 각진 턱, 깔끔하게 손질된 갈색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두말한 여지도 없이 그의 등장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그가 입은 최고급 갑옷은 반짝반짝 광이 나는 은사슬로 이어져있었고 그 위를 덮은 것은 다름아닌 왕실의 문양이었다. 맥길 왕가의 상징, 매의 문양 이였다. 순간 왕족과 마주 서있다는 생각에 토르의 입이 바짝 말랐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을 해명해보겠나. 초대장도 없이 경기장에 들어온 연유가 어떻게 되지?”

토르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보초병 세 명이 인파를 뚫고 나타났다. 일전의 뚱보 보초병이 숨을 가쁘게 쉬며 토르를 지목했다.

“저자가 저희의 명령을 무시했습니다. 제가 체포해서 지하 감옥에 구금시키겠습니다.”

“전 잘못한 게 없어요.”

“지금은?”

보초병이 고함쳤다.

“폐하의 영토에 허락도 없이 침입한 건?”

“단지 기회를 얻고 싶었다고요!”

토르가 다시 왕족 전사에게 몸을 돌려 애원했다.

“제가 바란 건 왕의 부대에 선발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훈련장은 선발된 소년들을 위한 곳이다.”

멀리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실버 전사 한 명이 원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50대 정도의 나이에 가슴이 넓고 몸집이 딴딴했다. 짧게 다듬은 수염위로 흉터가 가득했다. 일생을 전사로써 살아온 게 틀림 없었다. 갑옷 위 가슴에 붙어있는 황금배지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바로 이곳의 사령관임이 틀림 없었다. 사령관을 직접 본 토르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저는 선발되지 못했습니다, 주군. 그건 사실이죠. 그렇지만 전 평생 이곳에 오길 꿈꿨습니다. 제가 바란 건 오직 저의 진면목을 보여드릴 기회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기 모인 모든 선발대원만큼 뛰어납니다. 증명할 기회를 한번만 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지금껏 왕의 부대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이 전장은 꿈을 이뤄주는 곳이 아니다.”

걸걸한 목소리로 사령관이 대답했다.

“전사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예외는 없다. 선발된 사람만이 선발부대에서 심사를 받는다.”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초병들이 족쇄를 채우기 위해 토르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왕족 전사가 앞으로 나섰다. 손을 들어올려 보초병을 제지했다.

“때론 예외를 두는 경우도 있겠지.”

놀란 보초병들이 왕족 전사를 올려다봤다. 반박하고 싶은 모양새였지만 왕족에 대한 경의를 표하느라 오히려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네 기상이 대견하구나.”

전사가 말을 이었다.

“구금되기 전에 네 능력을 한번 보고 싶은데.”

“캔드릭 왕자, 규정을 어겨서는 안됩니다.”

사령관이 불쾌함을 드러냈다.

“규정은 왕족이 만든다.”

캔드릭 왕자의 어조가 단호했다.

“그리고 부대는 이에 따른다.”

“부대는 왕자님의 아버지인 폐하를 따릅니다. 왕자님이 아니라.”

사령관이 반박했다. 왕자만큼이나 단호했다.

주변이 긴장으로 가득 차 이내 삭막해졌다. 토르는 자신 때문에 벌어진 눈 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폐하는 내가 잘 안다. 폐하께서 어떻게 하실지도 잘 알지. 아마 이 소년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하셨을 거야. 그게 바로 우리가 할 일이고”

사령관은 몇 번의 신경전을 치르고 나서야 물러섰다.

캔드릭 왕자는 몸을 돌려 토르를 바라봤다. 갈색 눈동자에 강렬한 눈빛이었다. 왕자다운 용모 속에 전사의 기질도 함께 품고 있었다.

“네게 기회를 주마. 네가 저 표식을 명중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꾸나.”

왕자는 경기장 너머에 쌓여있는 건초더미의 정 중앙, 빨간 표식을 가리켰다. 건초 주변으로 여러 창이 박혀 있었지만 정 중앙에 박힌 창은 없었다.

“여기 모인 소년들 중 아무도 할 수 없는걸 해 낸다면, 즉 네가 저 표식을 명중한다면 왕의 부대에 합류할 수 있게 해주마.”

캔드릭 왕자는 옆으로 비켜섰다. 토르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걸 부정할 수 없었다.

창이 진열된 선반으로 가 주의 깊게 창들을 살폈다. 견고한 참나무 재질에 몸통은 최고급 가죽으로 둘러싼, 토르가 여태껏 본 적 없는 품질이 좋은 물건들이었다. 앞으로 좀 더 나서자 가슴이 떨렸다. 손등으로 흐르는 코피를 닦고 보니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자신의 모습이 느껴졌다. 분명한 건 거의 불가능한 임무가 주어졌단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토르는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창 하나를 집어 들고 손으로 창의 무게를 가늠했다. 상당한 무게였다. 그 동안 던져봤던 창들과는 크게 달랐다. 그러나 그럼에도 확신이 들었다. 토르는 이 창이라면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표식을 명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찌됐든 창 던지기는 토르가 돌 던지기 다음으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더군다나 오랜 기간 동안 양을 친 덕분에 이곳 저곳을 돌며 다양한 목표물을 명중시킨 경험도 있었다. 형들이 놓친 표적들도 토르는 늘 명중이었다.

토르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쉬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보초병들에게 끌려가 감옥살이를 할 게 뻔했다. 그리고 평생토록 왕의 부대엔 지원할 수 없게 된다. 이 한번의 기회로 토르가 꿈꿔온 모든 것이 좌우되는 것이다.

토르는 모든 걸 다 걸고 신에게 기원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두 눈을 떴다. 앞으로 두 걸음 나가 상체를 뒤로 뻗어 창을 던졌다.

날아가는 창을 보는 내내 숨도 쉬지 못했다.

‘제발, 신이시여, 제발.’

무거운 침묵 속에서 오직 토르가 던진 창만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고 토르는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된걸 느낄 수 있었다.

정적이 끝나고 소리가 들렸다. 창이 건초더미를 뚫는 소리였다.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느낌이 왔다. 확실한 느낌이 왔다. 흠 잡을 데 없는 명중이었다. 던진 창에서 손을 떼는 그 찰나에 느껴지는 손목의 각도로 토르는 이미 명중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토르는 결과를 보기 위해 눈을 떴고 확신이 사실로 확인되자 크게 안도했다. 창은 빨간 표식 정 중앙에 꽂혀 있었고, 그곳에 있는 유일한 창이었다. 다른 선발대원들이 못 해낸 일을 토르는 해냈다.

놀라움이 빚어낸 침묵이 주위를 감쌌다. 모든 선발대원과 실버들이 토르를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결국 캔드릭 왕자가 앞으로 나서 만족스러운 듯 손바닥으로 힘차게 토르의 등을 쳤다. 왕자는 크게 방긋 웃었다.

“내 결정이 옳았어, 넌 합격이야!”

“뭐라고요, 주군!”

보초병이 거세게 악을 썼다.

“불공정해요. 저 녀석은 불청객이라고요!”

“표식을 명중시켰다.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니다.”

“다른 후보들보다 어리고 작습니다. 꼬맹이 부대가 될 순 없죠.”

사령관도 반격하고 나섰다.

“나라면 저 표식도 못 맞추는 거인이 되기보단, 표식을 맞출 수 있는 작은 병사가 되고 싶을 테네.”

“운이 좋았을 뿐이죠!”

토르와 겨뤘던 거구의 소년이 외쳤다.

“우리도 기회만 더 주어지면 맞힐 수 있다고요!”

왕자는 뒤를 돌아 거구의 소년을 주시했다.

“맞힐 수 있다고? 그렇다면 한번 볼까? 네 최종선발여부를 두고 내기하겠나?”

거구의 소년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왕자의 제안을 차마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어쨌든 이 아이는 불청객입니다.”

사령관이 다시 말을 꺼냈다.

“어디 출생인지 신분도 알지 못합니다.”

“로우랜즈 출신입니다.”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뒤를 보며 목소리의 출처를 찾았지만 토르만은 달랐다.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줄 곳 자신을 괴롭혀온 목소리의 주인공, 첫째 형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는 나머지 두 형제들과 같이 앞으로 나와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토르를 노려보았다.

“저 녀석은 서부 왕국의 남부 주 출신 맥클리오드 가의 일족 토르그린입니다. 우리 형제들 중 막내고, 우리 모두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양을 돌보는 게 저 녀석 일이었습니다.”

모든 소년들과 실버 대원들이 웃어댔다.

토르는 얼굴이 빨개졌고 그 순간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순간은 없었다. 전형적인 형의 행동이었다. 토르의 영광을 모두 빼앗고 토르를 우습게 만들기 위해선 뭐든지 감행하는.

“목동이었다고, 이 아이가?”

사령관이 쫓아 물었다.

“그렇다면 적군들은 저 녀석을 피해 다녀야겠군요.”

다른 소년이 외쳤다.

또다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토르의 모욕감은 한층 더해졌다.

“충분히 했네!”

캔드릭 왕자가 단호하게 잘랐다.

서서히 웃음이 가라앉았다.

“나라면 지금 이렇게 웃어대기만 하는 자네들보다 저 표식을 명중시킨 목동을 선택하겠네.”

왕자의 말이 끝나자 모든 웃음이 멈추고 소년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토르는 왕자에게 더 없이 감사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왕자는 적어도 토르가 겪은 모든 일에 개의치 않고 토르의 자존심을 세워줬다.

“자네는 진정한 전사라면 친구를 고자질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가? 하물며 자신의 가족과 혈육은 더더욱 말이지.”

왕자가 드레이크를 꾸짖었다.

드레이크는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떨궜다. 드레이크가 당황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내 드레이크의 동생, 드로스가 앞으로 나와 항의했다.

“토르는 선발되지도 못했습니다. 선발된 건 저희입니다. 맹목적으로 저희를 따라온 겁니다.”

“따라오지 않았어.”

끝내 입을 연 토르가 반박했다.

“왕의 부대 때문에 온 거지 형들을 따라온 게 아니야.”

“왜 여기 왔는지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령관이 짜증이 난 듯 앞으로 나섰다.

“저 아이 때문에 모두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요. 창을 잘 던진 건 사실이지만 왕의 부대엔 들일 수 없습니다. 저 아이를 후원해줄 실버도 없을뿐더러 그와 짝을 이루고 싶어할 전속 동료도 없을 겁니다.”

“제가 전속 동료가 될게요.”

저 멀리서 누군가 대답했다.

토르는 깜짝 놀랐다. 다른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걸음 너머에 토르의 또래로 보이는, 금발 머리와 초롱초롱한 녹색 눈빛을 제외하면 토르와 생김새까지 비슷한 한 소년이 쇠사슬로 제작된 홍색과 검은색 표식의 최고급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또 다른 왕족이었다.

“말도 안됩니다. 왕족은 평민과 전속 동료가 되지 않습니다.”

사령관이 반박했다.

“행여 이를 허가한다 하더라도, 역시 저 아이는 자격이 안됩니다. 그를 후원할 실버가 없습니다.”

“제가 후원하겠어요.”

누군가가 외쳤다.

모두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시선을 돌렸고 다들 숨이 막힐 듯 놀랐다.

토르도 돌아보니 말을 탄 전사 한 명이 보였다. 눈이 부시게 반짝반짝 빛나는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온갖 종류의 무기들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마치 태양을 마주하는 것처럼 전사에게서 강한 빛이 느껴졌다. 한눈에 봐도 그의 품행과 태도에서 그리고 그가 쓴 투구로 보아 그가 보통의 실버 전사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최정예 명장이었다.

토르는 명장을 알아봤다. 명장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고 그와 관련한 전설도 들었다. 에레크였다. 토르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링 대륙의 모든 전사를 통틀어 단연 최고라 불리는 최정예 명장이었다.

“그러나 주군께선, 이미 후원자가 있습니다”

사령관이 항의했다.

“그렇다면 두 명을 후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차분한 저음의 에레크 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들 사이에선 당혹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그럼 이제 더 할말은 없는 거겠군.”

캔드릭 왕자가 상황을 정리했다.

“토르그린은 후원자도 있고 전속 동료도 생겼네. 모든 게 해결됐으니 이제 그는 왕의 부대 부대원이 됐네.”

“그렇지만 저희 일은 잊으셨습니다!”

뚱보 보초병이 앞으로 나오며 크게 외쳤다.

“어찌됐든 저 녀석이 폐하의 병사를 쓰러뜨린 건 사실입니다. 이는 반드시 처벌 되야 합니다. 정의를 구현해야지요!”

“정의는 구현돼야지. 그러나 나의 지시에 따라서지 자네의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야.”

캔드릭 왕자의 어조가 단호했다.

“그러나 주군, 저 녀석은 반드시 감옥에 갇혀야 합니다! 모두의 앞에서 본보기를 보이셔야 합니다.”

“계속 네 의견을 고집한다면 결국 네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캔드릭 왕자가 보초병을 노려보며 겁을 줬다.

결국 보초병이 물러섰다. 마지못해 돌아섰고 붉어진 얼굴로 토르를 노려봤다.

“이제 공식적으로 임명해야겠군, 왕의 부대 부대원이 된걸 환영하네, 토르그린!”

캔드릭 왕자가 소리 높여 외쳤다.

소년들과 기사들이 환호했다. 그리고 이내 제 자리로 돌아가 다시 훈련에 집중했다.

토르는 너무 놀라 아무 감각이 없었다. 자신조차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 왕의 부대 부대원으로 최종선발 된 것이다. 됐다. 꿈만 같았다.

토르는 캔드릭 왕자를 바라봤고 말로는 다 표현 못 할 깊은 감사를 느꼈다. 일평생 그 누구도 토르를 돌봐주거나, 늦은 귀가가 염려돼 찾으러 나선다거나, 보호해준 적이 없었다. 우습게도 토르는 이미 자기 아버지보다 캔드릭 왕자에게 더한 친밀함을 느꼈다.

“어떻게 감사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큰 빚을 졌습니다.”

캔드릭 왕자가 토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캔드릭이다. 외워두렴. 난 폐하의 첫째 아들이야. 네 용기에 감탄했다. 부대에 큰 보탬이 될 거야 믿는다.”

왕자는 서둘러 돌아갔고, 그 사이 토르와 싸운 거구의 소년 엘덴이 토르 옆을 지나갔다.

“등 뒤를 조심해. 우리가 너랑 같은 막사에서 자는 거 알지. 일초라도 네가 안전할거란 생각은 접어둬.”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엘덴은 자리를 떴다. 토르에겐 벌써 적이 한 명 생겨 버렸다.

토르는 앞으로 이곳에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다. 그때 왕의 막내아들이 토르에게 뛰어왔다.

“신경 쓰지마, 엘덴을 늘 저렇게 싸움을 걸어. 난 리스라고 해.”

“전속 동료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주시지 않으셨으면 난처할 뻔 했어요.”

리스 왕자가 건넨 악수에 응하며 토르가 대답했다.

“저런 괴물 같은 녀석에게 맞선 소년과 동료가 돼서 나야말로 기뻐, 꽤 멋진 싸움이었어.”

리스 왕자가 즐거운 듯 대답했다.

“농담이시죠? 엘덴 손에 죽을 뻔 했다고요.”

얼굴에 말라붙은 피딱지를 닦아내며 토르가 대답했다. 맞은 곳이 부어 오른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끝까지 싸웠잖아. 감탄했어. 우리들 중 누구라도 그대로 누워서 꼼작 안 했을 거야. 그리고 창 던지기는 최고였어. 그렇게 던지는 건 어디서 배웠어? 우리 평생 전속 동료하자!”

리스 왕자는 토르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토르와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친구하자. 평생 좋은 친구가 될 것 같단 말이야.”

왕자와 악수하며 토르는 그에게 한평생 함께 우정을 나눌 진실한 친구가 생겼다는 걸 느꼈다.

순간 누군가가 토르의 옆구리를 찔렀다.

돌아보니 토르보다 나이가 약간 더 많아 보이는 소년이었다. 길다란 얼굴엔 곰보자국이 가득했다.

“난 패스골드야, 에레크 명장님의 후원대상. 넌 명장님의 두 번째 후원대상이고. 따라서 넌 내 명령에 따라야 해. 그리고 곧 토너먼트가 시작돼. 방금 전 왕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명장님의 후원자로 선택 받았는데 이렇게 가만히 서있기만 할거야? 따라와! 빨리!”

리스 왕자는 이미 돌아서서 가버린 뒤였다. 토르도 재빨리 패스골드를 따라 운동장을 뛰어갔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걸 뒤로하고 토르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외치고 있었다.

이제 토르도 꿈꿔왔던 왕의 부대 부대원이 됐다.

제 7장

개리스 왕자는 서둘러 왕궁을 걸어갔다. 왕실의 예를 갖춘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든 인파를 헤치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맥길 왕과 독대를 나눴던 여파로 현기증이 났다. 어떻게 그가 후계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단 말인가? 개리스 왕자에게 왕은 절대 왕위를 넘기지 않으려는 것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적자들 중 장자였다. 늘 장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개리스 왕자는 지금껏 늘, 태어나면서부터 줄 곳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거라 확신해왔다. 달리 생각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불합리한 처사였다. 왕자를 제치고 그보다 어린 자식을 택하다니. 그것도 계집아이를. 최악이었다. 이 일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개리스 왕자는 왕국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게 불 보듯 뻔했다. 발걸음을 옮기던 개리스 왕자는 순간 세상의 모든 바람이 멈춘 것만 같아 숨을 쉬기 힘들었다.

왕자는 결혼식에 참석한 군중들 속에서 비틀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만 가지 색상의 예복을 입은 인파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고 모두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각계각층의 사람들이었다. 평민들과 이렇게까지 가까이 서 있다는 사실에 진절머리가 났다. 오늘은 예외적으로 미천한 출신들이 귀족들과 함께하도록 허락된 날이었고, 저 멀리 산악지대를 넘어온 동부 왕국의 미개인들이 왕궁에 입장할 수 있는 날이었다. 개리스 왕자는 여전히 자신의 누나가 이런 미개인들 중 하나랑 혼인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행사는 아버지가 주선한 한낱 정치적인 행보에 불과했다. 두 왕국간의 평화를 조성하려는 한심한 시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슨 연유에선지 그의 누나가 결혼 상대자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개리스 왕자는 어렵게 그 이유를 알아냈다. 왕자가 아는 공주는 그를 남편감으로써 좋아하기보다 왕자의 지위를 갖은 자의 아내가 되는 것에 흡족해했던 것이다. 누나에겐 일국의 왕비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개리스 왕자의 예상대로 누나는 원하는 걸 누릴 게 분명했다. 저 멀리 산악지대 너머 사는 모든 동부 왕국 사람들은 한낮 미개인에 불과했다. 왕자는 동부왕국이 덜 문명적이고 덜 정제되고 덜 세련됐다고 여겼다. 누나가 좋으면 결혼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길에 걸림돌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실상은, 누나가 멀리 가버리면 갈수록 왕자에겐 더 이득이었다.

허나 이 모든 건 더 이상 왕자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늘이 지나면 왕자는 왕이 될 기회를 영영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아버지의 왕국에서 이름없는 왕자로 잊혀질게 뻔했다. 이제 왕자가 쥔 모든 권력이 사라질 것이다. 평범해진 삶으로 불우하게 전락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늘 그래왔다. 맥길 왕은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통찰력이 깊다고 여겼다. 그러나 개리스 왕자야말로 아버지보다 통찰력이 깊었다. 언제나 그래왔다. 일례로 루안다 공주와 맥클라우드 왕가의 혼례를 주선한 아버지는 스스로를 정통한 정치인으로 여겼지만 개리스 왕자는 아버지보다 더 멀리 내다봤다. 왕자는 앞으로의 파급효과까지 예상할 수 있었고 이미 아버지보다 한 수 앞섰다. 왕자는 이 결혼이 초래할 비극을 이미 예상했다. 궁극적으로 맥클라우드 왕가는 이 결혼을 통해 잠잠해지기 보단 대범해질 것이다. 그들은 야수다. 따라서 이러한 평화의 손길을 대담한 관용으로 보기보다 나약함으로 여길 것이다. 그들은 가족간의 결속에 개의치 않는다. 누나가 혼인 후 왕국으로 돌아가면 분명 공격을 가할 것이다. 이 결혼도 결국엔 책략이다. 왕자는 맥길 왕에게 이를 알리려 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이 또한 더 이상 개리스 왕자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왕국의 하찮은 왕자 중 하나에 불과했다. 생각만해도 불같이 화가 치밀어 올랐고 순간 그도 상상 못한 엄청난 증오심이 아버지를 향해 솟구쳤다. 다시 어깨를 부딪히며 대중들 틈에 끼어들었다. 왕자는 걸어가는 내내 복수할 방법을 강구했다.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절대 손 놓고 상황을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절대 여동생이 왕위를 물려받게 놔둘 수 없었다.

“여기 있었네”

누군가 말을 걸었다.

펄스였다. 가지런한 이가 다 드러나도록 명랑하게 미소를 지으며 왕자 옆에 쫓아왔다. 열여 덜 나이에 키가 크고 늘씬했다. 목소리가 고음이었고 매끈한 피부에 두 볼은 붉게 빛났다. 왕자의 현재 애인이었다. 개리스 왕자는 평소 펄스를 만나면 기분이 좋았지만 지금은 펄스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나 피해 다녔지.”

펄스가 왕자에게 팔짱을 끼었다.

개리스 왕자는 즉시 팔을 쳐내며 주위에 본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바보야? 사람들 있는 곳에선 절대 다시 팔짱 끼지마. 절대.”

왕자가 펄스를 꾸짖었다.

펄스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생각이 짧았어.”

“맞아, 넌 생각이 짧아. 한번만 더 해봐, 다신 안 만날 줄 알아.”

왕자가 다그쳤다.

펄스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듯 대답했다.

“잘못했어.”

왕자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고 본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도했다. 그제서야 기분이 나아졌다.

“요즘 떠도는 소문은 뭐야?”

 

화제를 돌리기 위해 왕자가 펄스에게 말을 걸었다.

펄스는 즉시 기운을 차려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기대감으로 궁금해해. 다들 네가 후계자로 지목됐다는 공표를 기다리고 있어.”

왕자가 고개를 떨구자 펄스가 왕자를 살폈다.

“네가 아니야?”

펄스의 어조엔 의심이 가득했다.

왕자는 빨개진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고 펄스의 시선을 피했다.

“말도 안돼.”

펄스가 놀라움을 토로했다.

“아버지가 날 제외했어. 상상이 가? 공주 때문에. 내 어린 여동생 때문에.”

경악한 펄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건 불가능해. 장자는 너잖아. 공주는 여자잖아. 불가능하잖아.”

왕자가 펄스에게 고개를 돌려 얼음처럼 차갑게 대답했다.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둘은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며 걸었다. 인파가 더욱 거세지자 왕자는 주변을 살피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고 수많은 인파가 한자리에 모여있는 광경을 둘러봤다. 왕실은 사람들로 빈틈없이 메워졌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성문이란 성문을 모두 이용해 떼를 지어 모여든 게 분명했다. 그들은 모두 정성스럽게 만든 결혼식 무대로 향했고 무대 주위로는 적어도 천 석 이상의 최고급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좌석 하나하나 붉은 색 두꺼운 벨벳 쿠션을 놓았고 나머지는 모두 금으로 장식해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했다. 시중들은 그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자리를 안내하고 음료를 날랐다.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좌석들 사이로 꽃잎이 흩뿌려져 있었고, 양쪽에 맥길 왕가와 맥클라우드 왕가가 자리했다. 두 가문의 경계가 뚜렷했다. 각각 수백 명의 맥길 왕가와 맥클라우드 왕가의 왕족들이 가장 좋은 예복을 입고 하객으로 참석했다. 맥길 왕족은 맥길 왕가의 상징인 짙은 보라색 예복을, 맥클라우드 왕족은 어두운 주황색 예복으로 구분됐다. 개리스 왕자의 눈엔 두 가문의 차이가 뚜렷이 보였다. 맥길 왕족이 훨씬 기품 있다고 여겼고 맥클라우드 왕족들은 겨우 왕족 행색이나 하는 거라 치부했다. 격식에 맞춰 한껏 차려 입었지만 실상은 야수들에 불과했다. 왕자는 그들의 표정에서, 서로를 밀어대는 몸짓에서, 시끄럽게 웃어대는 매무새에서 야수의 흔적을 감지했다. 기품을 갖춘 차림으로도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들에게 깊게 내재되어 있었다. 게다가 결혼식이 이곳 왕궁에서 치러진다는 결정에 왕자는 몹시 분개했었다. 왕자는 이 모든 결혼식 자체에 분개했다. 이는 모두 그의 아버지가 내리는 어리석은 결정 중 하나일 뿐이었다.

개리스 왕자였다면 분명 전혀 다른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맥길 왕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주선하긴 했겠지만 왕자는 늦은 밤, 동부 왕국 출신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잠들 때를 노렸을 것이다. 그들이 골아 떨어진 연회장 문을 잠근 뒤 크게 불을 질러 완벽한 급습을 감행하면 그만이었다.

“야수들, 왜 폐하께서 저들을 이곳까지 들이셨는지 이해할 수 없어.”

펄스가 반대쪽 연회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덕에 곧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질 거야, 아버지께서는 적을 집안으로 들이셨고 결혼식을 가장한 군사력 경쟁을 벌이고 있지. 충돌이 발생하기에 완벽한 조건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해? 전쟁? 여기서? 여기 모인 병사들하고? 공주님의 결혼식 날?”

왕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맥클라우드 왕가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다.

“결혼식의 신성함 같은 건 저들에겐 안중에도 없어.”

“그렇지만 우리 쪽 병사들이 수천 명이나 된다고.”

“저들도 마찬가지야.”

왕자는 고개를 돌려 길게 늘어진 병사들을 주시했다. 맥길 왕가와 맥클라우드 왕가의 병사들이 양쪽으로 배치돼 있었다. 왕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충돌을 예상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병사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을. 특별한 행사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풍족하게 넘쳐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불어 끝없이 등장하는 연회 음식이 있는데도, 낮이 가장 긴 하지임에도, 꽃이 만발했음에도 여전히 모든 곳에서 긴장감이 감지됐다. 모두가 벼랑 끝에 서있었다. 왕자는 팔꿈치가 밖으로 향하도록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를 느꼈다. 서로가 불신에 가득 차 있었다.

왕자는 오히려 자신에겐 행운일수 있다고 판단했다. 저들 중 하나가 아버지의 가슴에 칼이라도 꽂는다면 그가 왕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질 테니 말이다.

“우리 같이 앉는 건 안 되겠지.”

자리로 향하는 펄스의 목소리엔 실망감이 역력했다.

왕자가 경멸의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

“얼마나 멍청한 거야?”

왕자의 목소리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왕자는 자신에게 맹목적인 펄스를 애인으로 삼은 게 과연 잘 한 일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감상적인 펄스를 하루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결국 그로 인해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날 게 뻔했다.

무안해진 펄스는 고개를 땅으로 떨궜다.

“그럼 이따가 안가에서 봐. 지금은 사라져 줄게.”

펄스는 남몰래 왕자의 몸을 살짝 건드리고는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누군가 왕자의 팔을 차갑게 꽉 쥐었다. 순간 왕자의 심장이 멈춘 듯 했다. 펄스와의 관계가 들통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내 팔에서 느껴지는 얇은 손가락과 긴 손톱을 감지하고 팔을 잡은 사람이 자신의 아내, 헬레나 공주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오늘 같은 날 절 망신주지 마세요.”

증오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가 야유했다.

왕자는 고개를 돌려 부인을 살펴봤다. 아름다웠다. 완벽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었다. 순백의 공단 정복을 갖춰 입고 머리를 곱게 올려 핀으로 고정했다. 최고급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착용한 그녀는 아름답게 화장까지 마친 상태였다. 왕자는 그녀의 빼어난 미모를 객관적으로 인지했다. 처음 결혼식을 올리던 그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매력을 느낀 건 아니었다. 왕자의 타고난 성적 취향을 배제한 채 여성과의 결혼을 권한 사람도 역시 그의 아버지 맥길 왕이었다. 이 덕에 개리스 왕자는 일평생 비틀린 관계를 감수하며 살아야 했다. 이러한 왕의 결정은 왕자의 취향에 대한 왕실 사람들의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도 낳았다.

“오늘은 당신 누나의 결혼식이라고요, 그래도 한번은 우리가 멀쩡한 부부인양 행색 해야죠.”

그녀는 왕자의 팔짱을 끼고 접근을 막아 논 예약석으로 걸어갔다. 왕실 병사 두 명이 줄을 걷어 이들을 안내했고 나머지 왕족들과 함께 식장 입구에서 곧 있을 왕족 행렬을 치르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트럼펫이 울렸고 서서히 군중이 조용해졌다. 하프시코드의 선율이 울렸고 더 많은 꽃들이 통로를 장식했다. 왕족의 행렬이 시작됐고 왕족부부들은 팔짱을 끼고 차례대로 줄을 지어 재단으로 행진했다. 개리스 왕자는 헬레나 공주에게 끌려 가는 행색이었다.

왕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어색함에 어쩔 줄 몰랐다. 어떻게 해야 금실 좋은 부부처럼 보여질지 난감했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 함께 자신만을 주시하며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길이 너무 길었다. 왕자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통로를 지나 재단 위 누이 옆에 서서 이 부부행색을 마무리 하고 싶었다. 그런데다 재단 위에서 맥길 왕을 마주할 걸 생각하니 끔찍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행여라도 후계 소식을 들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안 좋은 소식이 있소.”

왕자가 헬레나 공주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들은 재단 위로 올라갔고 드디어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해요?”

왕자는 놀란 눈으로 공주를 바라봤다.

그녀는 경멸스럽게 왕자를 봤다.

“첩자들을 심어 뒀다고요.”

왕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한 것인가?

“내가 왕이 못되면 당신도 왕비가 못되오.”

“왕비가 될 생각 추에도 없었어요.”

왕자는 더욱 뜻밖이었다.

“폐하께서 당신을 후계로 삼을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 안 했어요, 폐하께서 왜 그러시겠어요? 당신은 지도자감이 못돼요. 당신은 난봉꾼이에요. 그렇지만 내겐 해당사항이 없죠.”

왕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당신도 날 사랑하진 않잖소.”

왕자가 맞받아쳤다.

이번엔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도 왕자의 눈을 피해 애인을 두고 있었다. 왕자 또한 공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첩자가 있었다. 왕자는 공주의 사생활을 내버려뒀다.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왕자를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한 평생 외롭게 살길 바래요?”

“내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잖소. 그런데도 나와 결혼했소. 권력을 택했지. 사랑이 아니라. 모르는 척 하지 마오.”

“이건 정략결혼이었어요. 제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고요.”

“그러나 거부해보지도 않았잖소.”

왕자는 오늘 더 이상 헬레나 공주와 다툴 기력이 남지 않았다. 공주는 그런대로 꽤 유용한 꼭두각시 부인이었다. 때때로 헬레나 공주가 필요했기에 그녀가 왕자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지 않는 한 왕자는 그녀의 모든 행동을 참아냈다.

모두의 시선이 맥길 왕과 함께 신부 입장을 하는 루안나 공주에게로 집중됐다. 개리스 왕자 또한 뒤틀린 심사로 입장하는 그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제 딸을 인도하며 눈물을 닦는 저자는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뼛속까지 가식이 가득했다. 왕자의 눈에 맥길 왕은 그저 무능한 멍청이였다. 왕자는 맥길 왕이 소중한 딸을 늑대 같은 맥클라우드 왕가에 보내며 감수해야 하는 깊은 슬픔을 차마 알지 못했다. 개리스 왕자는 결혼을 흡족해하는 루안다 공주를 향해서도 같은 경멸을 느꼈다. 루안다 공주는 자신이 미개한 인간과 혼인한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그녀 또한 권력을 갈망했다. 냉정하고 계산적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녀는 형제들 중 개리스 왕자와 가장 많이 닮아있었다. 이들이 다정한 남매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리스 왕자는 때때로 그녀의 존재에 알 수 없는 위로를 느꼈다.

왕자는 불안함에 발을 가만두지 못했다. 빨리 결혼식이 끝나버리길 바랬다.

아르곤이 축복의 주문을 외우는 차례였다. 식이 진행되는 내내 왕자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이 모든 게 가식적이고 역겨웠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두 가문의 조합에 불과했다. 왜 있는 그대로 지금의 행사를 정치적 허세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인가?

다행히도 식이 오래 진행되진 않았다. 오늘의 주인공이 입맞춤을 나눴고 일제히 일어난 군중들이 환호했다. 요란한 경적소리가 울렸고 결혼식 식순이 완벽하게 끝나자 식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혼잡이 더해졌다. 왕족들은 모두 통로 끝에 마련된 연회장에 모였다.

냉소적으로 일관했던 개리스 왕자 또한 이 광경에는 감탄했다. 맥길 왕이 돈을 아끼지 않고 야심 차게 마련한 연회였다. 연회장에는 각종 테이블과 만찬, 와인 통, 끝도 없이 이어진 통돼지구이, 양 구이가 장관을 이뤘다.

그 뒤로 주요 행사가 준비 중이었다. 경연이었다. 돌 던지기, 창던지기, 활 쏘기를 위한 과녁이 세워졌고 그 뒤로는 마상 시합을 위한 경계선이 마련되고 있었다. 벌써부터 사람들이 이곳을 에워쌌다.

군중들은 이미 마상 경기장에서 자신들이 속한 왕국에 따라 양 갈래로 나뉘어 무리 지어 있었다. 맥길 왕가의 첫 주자는 역시 캔드릭 왕자였다. 갑옷을 멋지게 차려 입고 말에 올라 뒤로는 수십 명의 실버 대원들을 대동했다. 그 뒤로 조금 떨어져서 백마를 탄 에레크 명장이 등장했고 모든 군중들이 경외심에 숨을 죽였다. 명장은 마치 자석처럼 주위의 모든 시선을 끌어당겼다. 헬레나 공주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명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개리스 왕자가 이를 목격했다.

“벌써 스물 다섯이 코앞인데 미혼이에요. 왕국의 모든 여자들이 에레크 명장과 결혼하고 싶어 안달하죠. 그런데 왜 아직 결혼을 안 하는 걸까요?”

“그걸 당신이 왜 상관해?”

여자에겐 흥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왕자는 질투가 났다. 그도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마상경기에 참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전사가 아니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공주가 오만하게 손을 저으며 왕자를 무시했다.

“당신은 사내도 아니에요, 당신은 이런 거 이해 못해요.”

우롱 섞인 말투였다

왕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공주의 드센 기를 꺾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왕자는 사람들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는 공주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엉망이 되는 하루였다. 왕자는 벌써부터 속이 불편했다. 아주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끝도 없는 기사도 정신과 겉치레, 허식이 눈앞에서 벌어질 것이다. 서로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전사들의 마상 경기, 개리스 왕자는 철저히 배제되는 날이었다. 왕자가 싫어하는 모든 것이 한자리에 펼쳐지는 날이었다.

왕자는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남몰래 이 경기가 커다란 전쟁으로 발발하길 빌었다. 눈앞에서 유혈이 난무하고 경기장이 완벽히 무너져 산산조각 나길 바랬다.

언젠가는 원하는 걸 얻으리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왕위에 오르리라.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