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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로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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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토르는 패스골드를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패스골드는 인파 속에서 토르에게 서두르라며 손짓했다. 경기장 이후로 모든 것이 정신 없이 돌아갔다. 토르는 지금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이 얼떨떨했다. 머릿속이 혼미했고, 왕의 부대에 합류했다는 게 여전이 믿기지 않았다. 에레크 명장의 후원도 실감이 안 났다.

“내가 말했잖아, 꼬맹아, 빨리 오라고!”

패스골드가 재촉했다.

“꼬맹이”라는 말이 언짢았다. 패스골드는 고작해야 토르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였다. 토르가 자신을 놓치기라도 바라는 듯 패스골드는 군중 속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이곳은 항상 이렇게 북적거려?”

패스골드의 뒤를 쫓아가며 토르가 물었다.

“물론 아니지! 오늘은 낮이 가장 긴 하지인데다가 공주님의 결혼식 날이잖아. 뿐만 아니라 맥길 왕조 역사상 처음으로 유일하게 맥클라우드 왕족들에게 성문을 개방한 날이라고. 이렇게 붐빈 적은 한번도 없었어. 유례없는 일이야. 나도 이정도 일 줄은 몰랐어. 늦을 까봐 걱정이다.”

패스골드가 인파를 가르며 서둘러 대답했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거야?”

“우리는 개념 있는 후원부대원이라면 모두 하는 일을 하러 가는 거야. 명장님을 도우러 가야지!”

“뭘 도와?”

숨이 찬 토르가 헉헉대며 물었다. 날이 더욱 더워졌고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닦아냈다.

“왕실 마상경기!”

인파를 모두 헤치고 나와 당도한 곳에는 병사 한 명이 있었다. 패스골드를 본 병사는 다른 병사들에게 손짓해 출입을 허락했다.

밧줄 아래로 몸을 숙여 안쪽으로 들어가니 인파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내 토르는 두 눈을 의심했다. 토르가 들어간 곳은 마상 경기장이었다. 긴 선 뒤로 관중들이 빽빽이 보였고 모든 마상도로엔 경주마가 서 있었다. 말들의 체격이 어마어마하게 컸고 그 큰 말들 위로 완벽히 무장한 전사들이 앉아있었다. 실버 뿐만 아니라 양쪽 왕국의 여러 지방에서 올라온 전사들이 경기에 참여했다. 일부는 검은색 갑옷을 입고 있었고 나머지는 흰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갖가지 모양의 투구를 착용하고 각종 무기들로 무장했다. 세상의 모든 이목이 마상장에 집중된 것만 같았다.

몇몇 경기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토르가 알지도 못하는 출신의 전사들이 서로에게 돌격해 창과 방패를 부딪혔고 그때마다 군중들 속에서 짤막한 환호성이 들렸다. 가까이서 보니 말들이 보통 빠른 게 아닌데다가 힘까지 넘쳐났다. 무기가 부딪히며 울리는 소리도 굉장했다. 치명적인 예술이 아닐 수 없었다.

“저건 단순한 운동경기 이상인 것 같은데!”

패스골드를 따라 마상도로 주변을 걸어가며 토르가 말했다.

“그냥 운동경기가 아니니까 그렇지.”

무기가 부딪히는 마찰음 속에서 패스골드가 소리쳤다.

“경기를 가장한 사생결단이야. 매일 여기서 사람들이 죽어나가. 전쟁이야. 여기서 상처 없이 걸어나간다며 운이 좋은 거지. 근데 그런 사람들은 극히 일부야.”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전사 두 명이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충돌하는 모습이 보였다. 금속끼리 부딪히며 끔찍한 소리가 들렸고 그 중 한 명이 말에서 떨어졌다. 등을 대고 바닥에 누운 전사로부터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토르가 서 있었다.

관중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떨어진 전사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의 갑옷 위에 꽂힌 목검 조각이 토르의 시야에 들어왔다. 전사는 이내 고통으로 울부짖었고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후원부대원들이 뛰어나가 그를 살피더니 마상장 밖으로 끌어냈다. 승리한 전사는 천천히 행진했고 관중들의 환호에 맞춰 창을 들어올렸다.

토르는 경악했다. 마상 경기가 이렇게까지 치명적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방금 저 부대원들이 했던 게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이야. 너도 이제 후원을 받잖아. 정확히 말하면, 2인자지만.”

패스골드가 설명을 멈추고 토르의 얼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 지독한 입 냄새가 전해졌다.

“그리고 절대 잊지마. 난 에레크 명장님을 따르고, 넌 나를 따르는 거야. 네 일은 날 보좌하는 거야. 알겠어?”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애썼다. 토르가 예상했던 상황과는 모든 것이 딴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토르의 등장에 패스골드가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게 여실히 보였다. 토르에게 적이 한 명 더 생겨버렸다.

“일부러 너와 에레크 명장님 사이에 끼어들려고 한 게 아니야.”

패스골드가 아주 짧게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

“넌 명장님과 내 사이에 끼어들 수 없어, 꼬맹아. 앞으로 내 앞길 막지 말고 뭐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패스골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경계선 밖 구불구불한 통로로 가버렸다. 토르도 최선을 다해 따라갔지만 미궁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좁은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주변에선 말들이 울어댔고 일부 후원부대원들이 겁에 질린 채로 우는 말들을 달래고 있었다. 패스골드는 또다시 길을 우회해서 방향을 튼 뒤에서야 멈췄다. 그의 앞엔 아주 덩치가 크고 골격이 아름다운 말 한 필이 서 있었다. 토르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생명체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나무 울타리 하나로 가둬둘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전쟁에 나설 것 같은 기백이었다.

“왈핀이야, 에레크 명장님의 말이야. 여러 말 중 하나지. 에레크 명장님이 마상 시합에 주로 데리고 가는 녀석이야. 길들이는 게 보통이 아냐. 그렇지만 명장님은 잘 길들이셨지. 마문 좀 열어봐.”

토르는 영문을 몰라 패스골드를 쳐다보고 다시 문을 쳐다봤다. 어떻게 해야 문이 열리는지 살펴봤다. 앞으로 다가가 널빤지 사이에 놓인 말뚝에 힘을 줬다. 허나 쉽게 뽑히지가 않았다. 다시 힘을 주자 말뚝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나무 문이 열렸다.

토르가 재차 힘을 주니 왈핀이 힘차게 울며 몸을 쭉 빼 나무에 발길질을 했고 그 덕에 토르의 손가락 끝부분이 살짝 뜯겨나갔다. 잽싸게 손을 뺐지만 손끝이 아려왔다.

패스골드가 웃어댔다.

“이것 때문에 너한테 문 열라고 한 거야. 다음부턴 더 빨리 열어, 꼬맹아. 왈핀은 누굴 기다려주지 않아. 특히 너 따위는.”

토르는 발끈했다. 이미 패스골드가 거슬리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했다.

토르는 빠르게 문을 열었다. 이번엔 문을 열며 날렵하게 말의 옆으로 몸을 비켜섰다.

“말을 내보낼까?”

겁이 난 토르가 물었다. 이리저리 흔들며 발길질을 해대는 왈핀의 고삐를 잡아야 하는 게 무서웠다.

“물론 꺼내선 안돼, 그건 내 일이야. 넌 먹이를 주면 돼. 내가 주라고 할 때. 그리고 삽으로 배설물을 치우면 돼.”

고삐를 잡은 패스골드는 말을 마구간까지 인도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토르는 침을 꿀꺽 넘겼다. 그가 예상했던 부대 생활의 첫 시작은 이런 게 아니었다. 물론 어떻게든 부대 생활은 이미 시작됐고 토르는 이에 적응해야 했지만 너무 굴욕적이었다. 토르가 꿈꾼 건 전쟁과 영광과 격투였고 부대원들과의 경쟁과 수련이었다. 시종일을 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과연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두 사람은 어두운 마구간을 나섰고 다시 밝은 태양이 내리쬐는 마상경기장으로 돌아갔다. 마상장의 분위기 덕에 토르는 기분이 전환됐다. 찰나였지만 수천 명 관중들의 환호 소리와 격돌하는 전사들의 싸움 소리에 압도당했다. 어마어마하게 대립하는 금속 소리뿐만 아니라, 달리는 말들이 빚어내는 육중한 땅의 진동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사방으로 전사들이 있었고 후견부대원들이 그들의 곁에서 출전을 돕고 있었다. 후견부대원들은 전사들의 검에 광을 내고 무기에 기름칠을 했다. 또 안장과 끈을 확인했고 호명을 기다리며 말에 오르는 전사들의 무기를 재정비했다.

“엘말킨!”

경기 진행자가 호명했다.

토르가 들어본 적도 없는 지방 출신 전사였다. 큰 체구에 붉은 갑옷을 입은 엘말킨은 문이 열리자 마상장 안으로 질주했다. 토르는 때맞춰 급히 뒤로 물러서서 출전하는 엘말킨의 길을 비켜줬다. 엘말킨은 좁은 입구에서부터 돌진했고 그가 던진 창은 상대편 전사의 방패를 빗겨 맞췄다. 팽팽한 대립 끝에 상대 전사의 창에 가격당한 엘말킨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관중들이 열광했다.

엘말킨은 급히 점프해 몸을 일으켰다. 이리저리 돌며 그의 후견부대원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토르는 후견 부대원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철퇴를 다오!”

엘말킨이 소리쳤다.

후견부대원은 바로 몸을 움직였다. 무기 선반에서 철퇴를 집어 마상장 안으로 질주했다. 엘말킨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지만 주위를 뱅뱅 돌던 상대편 전사가 다시 돌진했다. 후견부대원이 엘말킨에게 철퇴를 전달하기도 전에 상대편 전사가 그들을 덮쳤다. 부대원이 너무 늦어버렸다. 상대편 전사가 창을 내리 꽂았고 부대원의 머리를 스쳤다. 창에 스친 충격으로 이리저리 돌던 부대원은 얼굴을 땅으로 박고 쓰러졌다.

미동도 없었다. 꽤나 먼 거리였는데도 흙을 뒤집어 쓴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지, 그렇지?”

토르는 나란히 서서 자신을 쳐다보는 패스골드를 봤다.

“마음을 강하게 먹으라고, 꼬맹아. 이건 전쟁이야. 그리고 우린 그 한가운데 있다고.”

오늘의 주요 대결을 앞두고 관중들이 조용해졌다. 토르는 주변이 기대감으로 가득한 걸 실감했다. 모든 마상 선수들이 이번 대결을 기다렸다. 한쪽 입구에서 캔드릭 왕자가 말을 이끌며 손에 창을 쥐고 걸어 나왔다.

맞은편 입구에서 맥클라우드 왕가의 독특한 갑옷을 입은 전사가 그를 마주하며 걸어 나왔다.

“맥길 왕족 대 맥클라우드 왕족.”

패스골드가 토르에게 속삭였다.

“맥클라우드 왕가는 수백 년 동안 맥길 왕가와 전쟁을 해왔어. 분명 저쪽은 이번 대결로 그 승패를 가늠하려 할 거야.”

출전한 전사 모두 챙을 내리자 경적이 울렸다. 전사들은 기합소리와 함께 서로에게 돌진했다.

그들의 민첩함에 토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금속이 세차게 부딪히며 팽팽하게 대립했고 찢어질 듯 울리는 소리에 토르는 양 손을 올려 귀를 막을 뻔 했다. 결국 두 전사가 같이 말에서 떨어지자 관중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전사들은 각각 몸을 일으켜 투구를 벗어 던졌고, 각자의 후견부대원들이 그들에게 달려가 단검을 건넸다. 두 전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다. 단검을 휘둘러 상대를 공격하는 캔드릭 왕자의 모습에 토르는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왕자의 모든 동작은 기품과 힘이 넘쳐났다. 맥클라우드 왕가 쪽도 기량이 좋은 전사였다. 앞 뒤로 뒹굴며 겨루느라 두 전사 모두 진이 빠졌지만 그 누구도 쓰러지지 않았다.

결국 서로의 검이 정면으로 부딪혔고 부딪힌 두 검이 모두 부러져 나갔다. 후견부대원들이 철퇴를 건네주기 위해 재빨리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캔드릭 왕자가 철퇴를 잡으려 손을 뻗은 순간 맥클라우드 쪽 후견부대원이 왕자의 뒤로 달려들어 철퇴로 왕자의 등을 내리쳤다. 습격을 받은 왕자는 땅 위에 쓰러졌고 관중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대편 전사가 검을 집어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 캔드릭 왕자를 발로 누르고 목을 겨눴다. 왕자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패배를 인정하네!”

캔드릭 왕자가 외쳤다.

맥클라우드 왕가 쪽 관중들이 승리의 함성을 질렀고 맥길 왕가의 관중들은 분노의 야유를 보냈다.

“부정행위야!”

맥길 왕가의 관중들이 외쳐댔다.

“속임수를 썼어! 부정행위야!”

분노의 야유가 울려 퍼졌다.

군중들은 점점 더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내 서로를 향한 야유가 퍼져 나갔고 관중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대립했다.

“이거 왠지 불길한데.”

패스골드가 입을 열었다. 그는 토르와 나란히 서서 관중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관중들이 일어섰다. 주먹이 오갔고 결국 총력전으로 번졌다. 대혼란이었다. 사내들은 격하게 주먹을 날리고 서로의 머리채를 잡으며 땅 위에 굴렀다. 점점 더 많은 관중들이 뛰어들어 싸움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경적 소리가 울렸고 양쪽 병사들이 나서서 관중들을 뜯어놓으려 사력을 다했다. 아까보다 더 큰 경적소리가 한번 더 울려 퍼지고 맥길 왕이 왕좌에서 기립하자 그제서야 주변이 조용해졌다.

“오늘은 그 어떤 충돌도 있어선 안되오!”

왕의 위엄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마상장에 울렸다.

“오늘은 축제의 날이오! 그리고 이곳은 내 왕국이오!”

관중들이 점차 냉정을 찾았다.

“만약 이 경합이 양쪽 왕국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각각 최고의 전사를 선별해 판가름 하는 게 어떻겠소.”

맥길 왕은 저 멀리 맡은 편에 수행원을 대동하고 자리 한 맥클라우드 왕을 바라봤다.

“동의하오?”

맥길 왕이 소리쳤다.

맥클라우드 왕은 엄숙하게 서 있었다.

“동의하오!”

맥클라우드 왕이 대답했다.

양쪽에서 관중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그쪽의 전사를 선택하시오!”

“이미 선택 했소.”

맥클라우드 왕이 대답했다.

맥클라우드 왕가 쪽에서 가공할 만한 외모의 전사가 서서히 등장했다. 토르가 지금껏 보지 못한 엄청난 거구의 전사가 말을 타고 서 있었다. 육중한 바위산 같은 형상이었다. 한번도 인상을 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얼굴에는 수염이 길게 자라 있었다.

토르의 옆에서도 움직임이 감지됐다. 옆을 보니 에레크 명장이 서 있었다. 명장은 왈핀 위에 올라타 앞으로 걸어갔다. 토르는 침을 꿀꺽 넘겼다. 이 모든 게 자신의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에레크 명장의 등장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걱정이 앞섰다.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토르는 바로 에레크 명장의 후원부대원이었고 명장은 이제 막 마상 경기에 출전했다.

“이제 뭘 해야 해?”

마음이 급해진 토르가 패스골드에게 질문했다.

“뒤로 물러서서 내가 하란 대로만 해.”

에레크 명장이 경기장 안으로 나섰다. 선택 받은 두 명의 전사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대립하고 있었다. 각자의 말이 팽팽한 신경전을 못 이기고 발을 굴러댔다. 토르는 주어질 임무를 기다리며 시합을 지켜봤고 점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경적이 울리자 두 전사가 돌격했다.

왈핀은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마치 물고기가 물 위로 뛰어오르는 것 같은 질주였다. 상대편 전사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러나 에레크 명장은 기품 있고 세련된 전사였다. 명장은 몸을 낮춰 바람을 가로 질렀고 그의 은빛 갑옷이 물결쳤다. 세상에 그보다 더 반짝이는 갑옷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두 전사가 팽팽히 맞섰다. 에레크 명장은 목표물을 정확히 겨냥해 창을 쥐고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명장은 상대편 전사의 일격을 피하는 동시에 상대편 전사의 갑옷 정 중앙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산처럼 큰 거구의 전사가 뒷걸음질 치며 땅에 떨어졌다.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떨어지는 형상이었다.

맥길 왕가의 관중들이 환호했다. 에레크 명장은 상대편 전사 옆을 지나 다시 방향을 틀어 원을 그리며 돌았다. 명장은 상대편 전사 투구의 챙을 올렸고 창 끝을 그의 목에 겨눴다.

“항복하라!”

에레크 명장이 소리쳤다.

상대편 전사가 침을 뱉었다.

“절대!”

넘어진 전사는 허리춤에 숨긴 주머니 속에서 잿더미를 한줌 꺼내 에레크 명장이 차마 피할 새도 없이 명장의 얼굴에 뿌렸다.

당황한 명장은 눈을 감싸며 창을 놓쳤고 말에서 떨어졌다.

떨어진 명장이 눈에서 손을 떼지 못하자 맥길 왕가의 관중들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거구의 전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으로 명장의 명치를 가격했다.

명장이 몸을 웅크리자 상대편 전사는 큰 바위덩어리를 머리위로 높이 쳐들어 에레크 명장의 머리를 조준했다.

“안돼!”

토르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괴성을 질렀다.

토르는 두려움에 떨며 상대편 전사가 내리꽂은 바위를 지켜봤다. 에레크 명장은 찰나의 순간에 간신히 몸을 굴려 바위를 피할 수 있었다. 명장의 머리가 놓였던 자리에 바위가 깊게 박혔다.

에레크 명장의 민첩함이 가히 놀라웠다. 벌써 일어나 편법을 쓴 거구의 전사를 마주하고 있었다.

“단검으로 승부하라!”

양쪽에서 왕들이 외쳤다.

패스골드는 뛸 준비를 하며 눈을 크게 뜨고 토르를 주시했다.

“빨리 단검을 줘!”

긴장한 토르의 심장이 요동쳤다. 토르는 에레크 명장의 무기 진열대로 가 필사적으로 단검을 찾았다. 눈 앞엔 아찔할 정도로 많은 무기들이 놓여있었다. 토르는 손을 뻗어 단검을 찾아 패스골드의 손에 건넸다.

“멍청아! 이건 중검이야!”

패스골드가 고함쳤다.

토르의 목이 타 들어갔다. 모든 관중이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초조함에 눈 앞이 막막해졌다. 어떤 검을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어 긴장감이 온 몸을 휩쓸었다.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패스골드가 나서 토르를 밀쳐내고 직접 단검을 찾았다. 그리고는 전속력을 다해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뛰어가는 패스골드를 바라보던 토르는 스스로가 쓸모 없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만일 자신이 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저곳으로 뛰어가고 있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봤다. 생각만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상대편 전사의 부대원이 한발 빨랐다. 이내 상대편 전사가 에레크 명장에게 단검을 휘둘렀고 명장은 단검을 기다리며 공격을 피했다. 드디어 패스골드가 명장의 손에 단검을 쥐어줬고 때마침 상대편 전사가 명장에게 돌진했다. 그러나 명장은 빼어나게 영리했다. 전사가 돌진하도록 몸을 피하지 않고 기다리다 막판에 옆으로 비켜섰다.

 

상대편 전사는 멈추지 못하고 계속 뛰었고 그곳에는 운 없게도 패스골드가 자리해 있었다. 명장을 놓친 전사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돌진해 두 손으로 패스골드의 머리를 움켜쥐고 그대로 박치기했다.

패스골드의 코뼈가 부러지고 코피가 흘렀다. 패스골드는 그 상태로 기절한 채 쓰러졌다.

경악한 토르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야유와 욕설을 퍼붓던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에레크 명장이 단검을 휘둘렀지만 상대편 전사가 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했고 둘은 다시 서로를 마주 봤다.

순간 토르는 이제 그가 명장의 유일한 후원부대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무얼 해야 하는 것일까? 토르는 준비가 안된 상태였다. 더군다나 왕국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였다.

두 사람은 일격에 일격을 가하며 서로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힘에서는 맥클라우드 쪽 전사가 에레크 명장보다 훨씬 앞섰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명장의 기량을 넘지 못했다. 명장의 움직임이 더 빠르고 민첩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단검을 휘두르고 찌르고 피했다. 막상막하가 따로 없었다.

결국 맥길 왕이 자리에서 기립했다.

“긴 창으로 승부하라!”

토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토르에게 방금 임무가 주어졌다.

무기 진열대를 살폈다. 무기 중에서 가장 긴 창다워 보이는걸 골라냈다. 창의 가죽 손잡이를 움켜쥐며 제발 자신이 고른 게 긴 창 이길 기도했다.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간 토르는 관중들의 시선을 느꼈다. 온 사력을 다해 달렸다. 최대한 빨리 에레크 명장에게 긴 창을 쥐어주고 싶었다. 자신이 상대 부대원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창을 건네 받은 에레크 명장은 손으로 창을 돌리며 상대 전사와의 대결을 준비했다. 명예로운 명장답게 그는 상대편 전사가 무기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토르는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상대편 전사의 길을 막지 않도록 자리를 비켰다. 패스골드와 같은 실수를 범할까 두려웠다. 자리를 비켜난 토르는 기절해있는 패스골드를 싸움터 밖으로 끌고 나왔다.

경기를 지켜보던 토르는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상대편 전사가 창을 건네 받자마자 수직으로 높이 들어 땅에 창을 거꾸로 내리꽂는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상황을 주시하던 토르의 눈엔 주변이 점차 흐려지고 오직 상대편 전사의 움직임만 세세하게 한 장면씩 들어왔다. 불길했다. 상대편 전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창이 느슨하게 풀려있는 게 보였다. 창의 칼날만을 분리해 수리 검으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마침내 거구의 전사가 창을 던져버렸고 분리된 칼날은 에레크 명장의 심장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갑옷도 충분히 관통할 수 있는 톱날이 박힌 칼날이었다.

순간 토르의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퍼져나갔다. 전신이 따끔따끔했다. 다크우드에서 시볼드와 혈전을 벌였을 때 받았던 느낌과 일치했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게 느려졌다. 날아가는 칼날도 속도가 더뎌졌다. 온 몸이 달아올랐고 몸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퍼져나갔다. 자신에게 이런 열기가 있었는지 토르도 의아했다.

앞으로 발을 내밀었고 칼날의 속도보다 몸이 빨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직 칼날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날아가는 칼날을 멈춰야 했다. 에레크 명장이 다치는걸 보고 싶지 않았다. 특히 이런 비열한 짓거리에 말이다.

“안돼!”

토르가 비명을 질렀다.

또다시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 칼날 쪽으로 손바닥을 쭉 뻗었다.

이제 막 에레크 명장의 가슴을 파고들려던 칼날이 찰나의 순간에 공중에 그대로 멈췄다.

멈춰진 칼날은 이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각각의 왕국을 대표하는 두 전사 모두 동시에 고개를 돌려 토르를 바라봤다. 관중들 또한 일제히 토르에게 시선이 멈췄다. 마치 전 세계가 토르를 주시하는 것만 같았고 그제서야 이 모든 사람들이 방금 전 벌어진 일을 모두 목격했다는 걸 깨달았다. 관중들은 토르의 비범함을 눈 앞에서 확인했다. 의도치 않게 토르가 경기에 개입돼버리고 말았다. 에레크 명장을 구해내며 패배를 눈앞에 뒀던 왕국의 운명을 바꿔놨다.

토르는 그 자리에 굳은 채 방금 벌어진 상황을 납득하려 애썼다.

부정의 여지도 없이 토르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다른 존재였다. 그는 달랐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제 9장

정신을 차리고 보니 토르는 왕의 막내 아들이자 토르의 전속 동료인 리스 왕자의 손에 이끌려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마상 경기 이후 모든 것이 멍해졌다. 토르가 한 모든 행동이, 에레크 명장을 구하기 위해 발휘된 힘이, 왕국 내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꼴이 됐다. 경기는 바로 종료됐다. 양국의 왕이 철수를 원했고 휴전이 선언됐다. 전사들이 경기장 밖으로 나오고 관중들은 충격에 동요되어 자리를 떴다. 토르는 리스 왕자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토르는 왕의 수행부대에 둘러 쌓여 있었고 이들과 함께 인파를 뚫고 있었다. 리스 왕자가 토르의 팔을 잡고 계속해서 그를 인도했다. 토르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마상장 안에서 무슨 짓을 한 건지 납득하기 힘들었고 그 일로 무슨 일이 초래될지 막막했다. 그저 눈에 띄지 않는 왕의 부대원 중 하나였기 바랬다. 모든 이목의 중심에 놓이길 바란 게 아니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토르가 지금 어디로 이끌려 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경기를 방해한 대가로 처벌을 받으러 가는 것인가? 물론 그가 에레크 명장의 목숨을 구한 건 사실이지만 후견부대원으로선 금기사항인 전사들의 승부에 개입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포상이 내려질지 문책이 내려질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리스 왕자가 토르를 이끌며 질문했다. 속수무책으로 왕자를 따라가던 토르는 아까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토르가 지나가는 내내 사람들은 괴물이라도 보는 냥 넋을 놓고 그를 주시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저 명장님을 돕고 싶었어요. 그리고……도왔고요.”

리스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에레크 명장의 목숨을 구했어. 그게 어떤 건지 모르겠어? 그 분은 가장 명망 높은 명장이야. 네가 그런 분을 구한 거야.”

리스 왕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토르의 기분이 좋아졌고 마음이 안정됐다. 리스 왕자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왕자에겐 상대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토르는 지금 처벌을 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사람들이 토르를 영웅 비슷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뭔가를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명장님이 죽지 않길 바랬을 뿐이에요. 그리고 자연스레 그렇게 됐어요. 별거 없었어요.”

“별거 없었다고?”

리스 왕자가 놀랐다.

“난 그런 거 못하잖아. 그런 거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모퉁이를 돌자 눈 앞에 하늘높이 뻗어있는 왕궁이 보였다. 기념비 같았다. 도개교 진입로 앞에서는 병사들이 줄지어 차려 자세를 취하고 군중들을 차단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몸을 옆으로 비켜 리스 왕자와 토르가 지나가도록 길을 내줬다.

두 사람은 양 옆으로 서 있는 병사들을 지나 철 못이 덮인 커다란 아치형 문을 향해 걸었다. 병사 네 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옆으로 비켜서서 차려 자세를 취했다. 이런 대우를 받고 있자니 황송할 뿐이었다. 마치 토르가 왕족이라도 된 것 같았다.

궁궐로 들어섰고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토르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차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왕실 내부는 엄청나게 넓었고 어마어마하게 높은 벽을 둘러싼 돌의 두께와 너비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수백 명의 왕실 구성원들이 고조된 움직임으로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왕궁 내부는 사람들의 즐겁고 들뜬 마음으로 분위기가 고조돼있었다. 토르가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아봤다. 사람들의 시선에 토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두가 무리를 지어 넋을 놓고 복도를 내려가는 토르와 리스 왕자를 바라봤다. 좋은 옷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한자리에 모여있다는 게 신기했다. 보이는 여자들의 나이대가 다양했다. 모두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서로 팔짱을 꼈고, 지나가는 토르를 보고 귓속말을 나누며 킥킥거렸다. 토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맘에 들어서 그러는지 자신을 놀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이목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특히나 이곳은 왕궁이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따름이었다.

“왜 절 비웃는 거죠?”

왕자가 돌아서서 빙긋 웃었다.

“비웃는 게 아니야. 네가 좋아서 그래. 넌 유명인사라고.”

“유명인사요? 무슨 말씀이세요? 전 방금 여기 왔는데요.”

왕자가 웃으며 토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토르 덕에 즐거워 보였다.

“왕실에선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소문이 빨라. 특히 너 같은 새로운 인물은. 음, 사실 오늘이 좀 더 유난스럽긴 해.”

“어디로 가는 거죠?”

토르는 자신이 어디로 안내 받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널 보고 싶어하셔.”

왕자는 또 다른 복도로 방향을 틀며 대답했다.

토르는 침을 삼켰다.

“왕자님 아버지시라면? 그러니까……폐하? 왜 폐하께서 절 만나고 싶어하시죠? 진짠가요?”

왕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야. 긴장 풀어. 그냥 내 아버지를 만나는 거야.”

“그냥 아버지요? 그분은 왕이시라고요!”

토르의 목소리는 불신에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께선 좋은 분이셔. 아마 즐거운 자리가 될 거야. 넌 에레크 명장님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잖아.”

토르는 계속해서 침을 넘겼고 손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두 사람은 커다란 문을 열고 웅장한 연회실로 들어섰다. 토르는 순간 경이로움에 취한 채 머리위로 둥글게 곡선을 그리며 드리워진 천장을 바라봤다. 끝도 없이 높은데다 정교한 장식이 그 화려함을 더했다. 벽으로는 아치형 창문에 색색의 유리가 수 놓여 있었다. 대략 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연회실을 채우고 있었지만 필요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장소였다. 연회 테이블이 끝도 없이 길게 줄지어 이었고 사람들은 그 앞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만찬을 나누고 있었다. 양쪽 테이블 사이로 좁은 길이 보였다. 그 길을 따라 깔린 붉은색 카펫은 왕좌가 들어선 연단까지 펼쳐져 있었다. 리스 왕자와 토르가 카펫에 올라 왕에게 걸어가자 양 갈래로 사람들이 길을 비켰다.

“네가 지금 저 아이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기나 해?”

난데없이 적개심이 가득한 콧소리가 들렸다.

토르는 고개를 들어 눈 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토르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고 귀한 차림새를 보니 왕자임이 분명했다. 남자는 인상을 가득 쓴 채 토르와 리스 왕자의 길 앞을 막아 섰다.

“폐하의 분부셔, 폐하의 분부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면 비켜줘.”

리스 왕자가 재빨리 대답했다.

길을 막아선 왕자는 그 자리에 서서 인상을 구긴 채 마치 썩은 음식이라도 문 것 같은 표정으로 토르를 관찰하고 있었다. 토르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굽은 몸과 무례한 행동, 쉬지 않고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니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평민은 입장할 수 없는 연회장이야, 당장 이 미천한걸 밖으로 내보내. 원래 있던 곳으로.”

숨이 막혔다. 분명 이 자는 토르를 싫어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방금 내가 들은 대로 아버지께 전해 드릴까?”

리스 왕자가 반격했다.

마지못한 왕자는 뒤를 돌아 순식간에 자리를 떴다.

“누구시죠?”

앞으로 걸어가며 토르가 물었다.

“마음에 두지 마, 내 형이야. 첫째 형, 개리스 왕자. 음, 실제로는 맏형이 아니지. 적자 중에서는 맏형이지만. 오늘 네가 훈련장에서 만난 캔드릭 형이 진짜 맏형이야.”

“개리스 왕자는 왜 절 싫어하죠? 전 왕자님을 알지도 못하는데.”

“괜찮아. 형이 너만 싫어하는 게 아니니까. 형은 누구든지 다 싫어해. 왕족과 친분을 유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협이라고 여겨. 형은 상관 하지마. 그냥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야.”

걸어가는 내내 토르는 리스 왕자에게 더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리스 왕자야말로 토르를 진정한 벗으로 대해줬다.

“왜 저를 위해 형과 맞섰죠?”

토르가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리스 왕자는 어깨를 들썩였다.

“아버지께 너를 데려오라고 분부 받았어. 또 넌 내 전속 동료잖아. 하나 더 추가하자면, 나와 또래가 비슷한 맘에 드는 친구를 정말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고.”

“그렇지만 제가 왜 마음에 드세요?”

“네겐 전사의 기상이 있어. 그건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토르는 혹시 그 동안 자신이 리스 왕자를 쭉 알고 지낸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이상한 착각이었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선 리스 왕자가 친형제 같았다. 처음으로 느낀 형제애였다. 친형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좋은 느낌이었다.

“나머지 형들은 개리스 형하고는 달라, 걱정 마.”

토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두 사람 주변에 무리 지어 모여들었다.

“오늘 네가 만난 캔드릭 형이 제일 사람이 좋아. 우리 어머니 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겐 한 배에서 나온 형이나 다름없어. 개리스 형하고 비교도 안될 만큼. 캔드릭 형은 내게 제2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야. 네게도 분명 그런 존재가 돼줄 거야. 형은 날 위해 뭐든지 다 해줘.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고. 형은 백성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어. 형이 왕이 될 수 없다는 건 정말 큰 손실이지.”

“형들 이라고 하셨죠. 또 다른 왕자님께서 계세요?”

리스 왕자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형이 한 명 더 있지. 그렇고말고. 많이 친하지는 않아. 고드프리 형은 애석하게도 평민들과 술집을 다니며 세월을 허비해. 전사도 아니고. 전사 따윈 관심도 없어. 아무데도 관심이 없어. 술과 여자 외엔.”

갑자기 한 소녀가 나타나 두 사람 앞을 막아 섰다. 순간 토르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토르보다 한두 살 나이가 많아 보였다. 아름다운 두 눈동자는 푸른 빛을 띠었고 윤이 나는 매끈한 피부에 기다랗게 늘어뜨린 빨간 머리가 매혹적이었다. 레이스로 장식된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는, 기쁨과 장난기 속에서 춤을 추는듯한 생기 넘치는 두 눈을 반짝이며 서 있었다. 토르는 시선을 마주한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잡혀버렸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소녀에게 완전히 매료 당했다.

소녀가 웃었다. 새하얀 치아가 살짝 드러났다. 토르가 이미 첫 눈에 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미소 하나만으로도 토르는 완전히 소녀에게 사로잡혀버렸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가슴이 두근거려본 적이 없었다.

소녀 앞에 선 토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내 소개 안 해줄 거니?”

소녀가 왕자에게 물었다. 소녀의 목소리가 토르의 귀에 맴돌았다. 상상했던 목소리보다 훨씬 더 감미로웠다.

리스 왕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이 내 누이.”

왕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웬 누나, 이쪽은 토르. 토르, 이쪽은 그웬.”

그웬 공주가 인사를 건넸다.

“이곳은 마음에 드니?”

공주가 웃으며 물었다.

토르는 얼어붙은 채 서 있기만 했다. 결국 공주가 킥킥 웃었다.

“과묵한 성격인가 봐.”

공주가 웃으며 얘기했다.

얼굴이 빨개진 토르가 목을 가다듬었다.

“아……저……죄송……해요. 저는 토르에요.”

공주가 킥킥 웃었다.

“이미 알고 있어”

그웬 공주는 리스 왕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스야, 네 친구가 드디어 말을 했어.”

“아버지께서 토르를 빨리 보고 싶어하셔. 너무 지체했어.”

왕자의 목소리게 초조함이 묻어났다.

토르는 공주와 계속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공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공주를 만나서 얼마나 행복한지, 공주가 길을 막아 서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꿀 먹은 벙어리가 따로 없었다. 이렇게까지 긴장한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뱉은 말은 고작 이거였다.

“감사합니다.”

공주가 킥킥거리다 결국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감사하다는 거니?”

공주의 눈이 반짝였다. 이 상황을 재미있어했다.

토르는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음……잘 모르겠어요.”

토르가 얼버무렸다.

공주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고 토르는 창피했다. 리스 왕자는 토르의 팔꿈치를 잡아 재촉하며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뒤 토르는 어깨 넘어 공주를 돌아봤고 공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토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토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벙어리처럼 말이 안 나온 게 너무 민망했다. 토르는 한번도 또래 여자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는 또래 여자애들이 없었다. 더군다나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토르는 여자 앞에서 어떻게 얘기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누나는 수다쟁이야, 신경 쓰지마.”

“그분의 이름이 뭐죠?”

왕자의 표정이 우스꽝스러워졌다.

“누나가 아까 말해줬잖아!”

리스 왕자는 웃어버렸다.

“죄송해요……저……까먹었어요.”

“그웬돌린. 다들 그웬 공주라고 불러.”

그웬돌린. 토르는 마음속으로 이름을 반복해 외쳤다. 그웬돌린. 그웬.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세기고 싶은 이름이었다. 혹시 다시 볼 기회가 있을지 궁금했다. 허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평민인 토르의 신분 때문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속이 상했다.

어느덧 주변이 조용해진 까닭에 고개를 들어 보니 왕좌가 눈앞에 가까이 있었다. 그 위로는 맥길 왕이 자리해 있었다. 왕실의 보라색 장막을 두르고 왕관을 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리스 왕자는 왕 앞에 무릎을 꿇었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토르도 왕자를 따라 무릎을 꿇자 연회실에 정적이 흘렀다.

왕은 목을 한번 가다듬은 뒤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왕의 목소리가 연회실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서부 왕국 남부 주, 로우랜드 출신 토르그린. 네가 오늘 왕실의 마상경기에 개입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침이 바짝 말랐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폐하의 첫 질문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처벌을 받게 될까 두려웠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의도한 게 아니었습니다.”

왕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한쪽 눈을 치켜세웠다.

“의도한 게 아니라고? 에레크 장군을 구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는 말인가?”

토르는 당황했다. 왕이 그를 궁지로 모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폐하. 의도한 거였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왕실의 경기에 개입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인가?”

토르는 너무 떨렸다.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그저…… 돕고 싶었습니다.”

“돕고 싶었다?”

왕이 되받아 치며 몸을 젖히고 호탕하게 웃어댔다.

“돕고 싶었다니! 에레크 명장을! 제일 뛰어나고 제일 명망 높은 전사를!”

연회실이 웃음으로 넘쳐났다. 토르는 얼굴이 빨개졌다. 이렇게 얼굴이 여러 번 달아오른 하루는 처음이었다. 그냥 이렇게 가만히 앉아 놀림만 당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일어나 가까이 오거라, 젊은 친구”

왕이 명령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왕이 웃으며 쳐다보는 모습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토르는 서둘러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왕은 토르를 유심히 살폈다.

“얼굴에 고귀함을 품었구나. 보통의 소년과는 다르구나. 확실하게 달라……”

왕이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었다.

“에레크 명장은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전사이다. 오늘 아주 훌륭한 일을 해 주었어. 우리 모두에게 말이야.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오늘부터 너를 가족으로 삼겠다. 나의 왕자들과 똑같이 존경 받고 똑같은 영예를 누리게 될 거다.”

왕이 앞으로 몸을 일으켜 크게 외쳤다.

“이를 공표하라!”

연회실이 엄청난 환호성으로 가득 울렸다.

토르는 주위를 둘러봤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왕족이 된다니. 토르가 꿈꿔온 것에 비해 분에 넘쳤다. 그가 원했던 건 그저 왕의 부대에 선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그 이상이었다. 감사함과 기쁨만이 가득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했다.

차마 대답도 올리기 전에 연회장에 음악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토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축제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수라장 같았다. 왕을 올려다본 토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왕의 시선에서 애정과 흠모와 포용을 느꼈다. 살면서 부성애란 걸 느껴본 적이 없는 토르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토르는 왕이 아닌 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 하루 만에 토르의 세상이 바뀌었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

그웬돌린 공주는 토르가 궁궐 밖으로 나가기 전 한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 틈에서 인파를 가르고 있었다. 토르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고 마음 속에서 토르의 이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토르를 본 이후부터 계속 토르만 생각날 뿐이었다. 공주보다 어리긴 했지만 그래 봤자 겨우 두 살 차이였고 게다가 토르에게 선 성숙함이 풍겼다. 또래보다 의젓했고 깊이 있는 사내였다. 공주는 첫눈에 이미 토르에게서 오랜 친숙함을 느꼈다. 토르와의 만남을 곱씹다가 빨개진 토르의 얼굴이 떠오를 땐 공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공주는 토르의 눈빛을 통해 토르도 공주와 같은 마음일거라 짐작했다.

토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공주도 마상장에서 벌어졌던 일을 목격했고 동생 리스 왕자가 토르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하는 알고 있었다. 토르가 특별한 존재라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줄곧 토르를 주의 깊게 살펴봤다. 분명 토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보였다. 게다가 토르와의 만남 후 공주는 확신이 들었다. 토르는 확실히 이곳 왕실에서 태어나 자란 모든 왕족과는 달랐다. 그는 외지인이었다. 또 평민이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의 행동에선 고귀함이 묻어났다. 마치 토르 스스로 자신에게 큰 자부심을 가진 것 같았다.

공주는 위층 발코니 끝으로 자리를 옮겨 아래를 내려다봤다. 눈 밑에 펼쳐진 왕궁의 전경 속에 떠나는 토르의 모습이 보였다. 리스 왕자가 토르의 옆에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나머지 부대원들처럼 훈련을 받기 위해 막사로 가고 있었다. 급격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벌써 머릿속으로 토르를 다시 만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공주는 토르라는 아이가 몹시 궁금했고 이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실의 모든 일과 모든 사람들을 다 알고 있는 한 사람과의 대화가 절실했다. 바로 공주의 어머니.

 

공주는 다시 뒤돌아 인파 속을 헤쳤다. 궁전 뒤 복도를 지나 눈에 익은 길을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걸음을 재촉했다. 현기증이 났다. 어지러운 하루였다. 우선 왕과의 접견에서 왕국을 통치하라는 생각지도 못한 결정을 들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을 무방비 상태로 접해버렸다.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뿐이었다. 어떻게 공주가 왕국을 다스린단 말인가?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라며 생각을 접으려고 애썼다. 여전히 아버지는 건강했고 기력 또한 좋았다. 공주는 그 누구보다 아버지가 오래 살길 바랬다. 그녀의 곁에서, 행복하게 말이다.

여전히 오늘 아침 집회실 일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버지의 결정은 미래를 기다리며 조용히 잠복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공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토록 만들게 뻔했다. 아버지의 후계를 잇게 되는 것이다. 공주의 오빠들 중 하나가 아닌, 바로 공주 자신이. 두려움이 몰려오는 한편 스스로가 중요하게 느껴졌고 그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자신감도 생겨났다. 왕의 판단으론 공주가 나라를 다스리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형제들 중 가장 현명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공주는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덕에 걱정이 앞섰다. 여자의 몸으로 왕위를 계승하면 어마어마한 원한과 시샘을 불러 일으킬게 뻔했다. 이미 개리스 왕자의 질투가 시작됐다. 공주는 바로 그 사실이 무서웠다. 공주는 개리스 왕자가 끔찍하게 교묘하고 완벽하게 관용이 없는 인물이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게 뻔했고 결국 이 일로 개리스 왕자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사실에 공주는 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개리스 왕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왕자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선형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돌 계단을 디딜 때마다 발소리가 울렸다. 또 다른 복도를 지나 예배당 뒤를 가로질러 또 다시 문을 통과했다. 여러 경비병을 지나쳐 궁궐의 비공개 회의실로 들어갔다. 왕비는 대외적인 공무를 좋아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언제나 그런 자리를 일찌감치 피하고 개인 회의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공주는 경비병을 지나 또 다른 복도로 내려가 왕비의 드레스 룸에 도착했다. 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내 멈췄다. 문 밖으로 나지막이 들려온 언성 덕에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왕비가 언쟁 중이었다. 공주가 귀를 기울이자 왕의 목소리가 들었다. 부모님께서 다투고 계셨다. 그런데 대체 왜?

자신이 엿들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궁금함을 견딜 수 없었다. 손을 뻗어 철 손잡이를 잡고 묵직한 참나무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아주 약간의 틈만 만들어 가까이 귀를 기울였다.

“그 아이를 절대 궁궐에 들일 수 없어요.”

왕비가 왕을 향해 톡 쏘아댔다.

“상황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성급하게 반대부터 하는군.”

“다 알고 있어요. 넘칠 만큼 잘 알고 있어요.”

왕비의 말투에 독기가 가득해 공주는 깜짝 놀랐다. 부모님이 다투는 일은 거의 일이 없었다. 평생 손에 꼽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이토록 격하게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궁금했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막사에서 지내게 하세요. 궁으로 들어오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아시겠어요?”

“궁은 매우 넓잖소, 당신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오.”

“제 눈에 띄든 아니든 상관 없어요. 그 아이가 이곳에 머무는 게 싫어요. 폐하가 저지른 일이에요. 폐하께서 그 아이를 이곳에 들이도록 허락하셨잖아요.”

“당신도 다 잘하는 건 아니오.”

왕이 맞받아쳤다.

발소리가 들렸고 왕이 방을 가로질러 반대쪽 문으로 나갔다. 등 뒤로 문이 닫히며 어마어마한 소리에 방 전체가 울렸다. 왕비는 방 한가운데 홀로 남겨져 눈물을 떨궜다.

공주는 괴로웠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자리를 뜨는 게 제일 좋았겠지만 왕비가 우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갈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무엇 때문에 부모님께서 서로 언성을 높이셨는지 궁금했다. 토르 때문일 거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어머니께서 왜 신경을 쓰시는 건가? 왕궁에 사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은데.

역시나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두고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어머니를 위로해드려야 했다. 공주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삐걱하는 문소리에 무방비 상태로 있던 왕비가 돌아봤다. 공주임을 확인하자 인상이 찌그러졌다.

“노크 할 줄 모르니?”

왕비의 어조에 노여움이 가득해 공주는 속상했다.

“무슨 일이에요, 어머니?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말씀 나누시는 걸 들었어요.”

“그래, 엿들어선 안됐어.”

왕비가 쏘아붙였다.

공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비는 가끔씩 다가가기 힘들었지만 이 정도인 적은 없었다. 왕비의 노여움에 가까이 가려던 공주는 그 자리에 멈췄다.

“새로 온 아이 토르 때문인가요?”

왕비는 뒤돌아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아냈다.

“왜 그러시는 모르겠어요, 그 아이가 머무는 곳이 왜 신경 쓰이시는 거죠?”

“내 일에 상관하려 들지 말거라.”

왕비의 말투가 차가웠다.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용건이 뭐지? 여긴 왜 온 거니?”

공주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비에게 토르에 대한 모든 걸 말해달라고 왔지만 때를 잘못 맞춰 온 꼴이었다. 망설이던 공주는 목을 가다듬었다.

“사실은……어머니께 토르에 대해 여쭤보러 왔어요. 그 아이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

공주를 돌아본 왕비는 커다란 의구심에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물어보는 왕비의 어조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공주는 왕비가 자신을 살펴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왕비가 가진 초자연적인 직관력을 발휘해 공주의 눈을 들여다보며 토르를 좋아하는 공주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토르에 대한 감정을 숨기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냥 호기심이에요.”

공주의 대답이 설득력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순간 왕비가 공주에게 다가가 거칠게 공주의 팔을 잡고 얼굴을 주시했다.

“잘 들어둬.”

왕비가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두 번 얘기하는 일 없을 거야. 그 아이를 가까이 하지 말거라. 알아듣겠니? 어떤 상황에서도 그 아이와 가까이하는 건 용납 못한다.”

공주는 겁에 질렸다.

“도대체 왜요? 그 아이는 영웅이에요.”

“그 아이는 우리와 달라.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던 난 네가 그 아이와 거리를 두길 원해. 알겠니? 맹세하렴. 지금 당장 맹세해.”

“맹세하지 않을 거예요.”

공주는 있는 힘껏 몸부림 쳐 왕비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 아이는 평민이야, 넌 공주고. 공주라는 사실을 기억해라. 알아 듣겠니? 그 아이 근처에 얼씬이라도 하는 날엔 두 번 다신 그 아이가 이곳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거다. 알겠니?”

공주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왕비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제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마세요, 어머니.”

공주는 최대한 용기 있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음 속으론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토르에 대한 궁금증에 이곳에 왔지만 이젠 그게 겁이 났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그러나 그 아이의 운명은 네가 어떻게 행동하냐에 달렸다. 명심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