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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맥길 왕은 연회장에 앉아 신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맡은 편에는 맥클라우드 왕이 앉아 있었고 그 사이로 양쪽 가문을 대표하는 수백 명의 신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혼식 축제의 환락은 몇 시간이나 계속 이어졌고 두 왕국 사이의 긴장감도 마상경기 이후 수그러들었다. 맥길 왕이 예상했듯이 모두에게 필요했던 건 술과 만찬과 유흥이었고 이로써 각국 백성들이 서로에 대한 견제를 완전히 풀었다. 이들은 모두 같은 테이블에 앉아 형제라도 되는 냥 어깨동무를 나눴다. 이들을 내려다보는 맥길 왕 조차 눈 앞의 신하들이 다른 왕국 출신이라는 걸 구분할 수 없었다.

맥길 왕은 오명을 벗은 듯 개운했다. 결국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 벌써부터 두 국가의 관계가 긴밀하게 느껴졌다. 선대 왕들이 그 동안 풀지 못한 난제를 왕이 해결했다. 선대 맥길 왕들은 모두 링 대륙의 두 국가를 단결시키려 애썼다. 동반자 관계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서로에게 평화로운 이웃국가가 되길 바랬다. 맥길 왕의 첫째 딸 루안다 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맥클라우드 왕의 장자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맥길 왕의 죄책감이 한층 덜렸다. 비록 루안다 공주를 맥클라우드 왕가에 시집 보냈지만 적어도 왕은 공주가 원하던 여왕의 지위를 얻을 수 있게 해줬다.

맥길 왕은 그 동안 벌였던 자문단과의 언쟁을 회상했다. 두 왕국의 결속을 이루기 위해 왕은 모든 자문단의 의견을 거스르고 뜻대로 일을 진행했다. 이렇듯 두 왕국의 평화는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니었다. 그나마도 언젠가 때가 되면 맥클라우드 왕은 하이랜드 산악지대의 경계선에 이이를 제기할 것이고 이 결혼의 의미도 금새 잊혀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낼 게 뻔했다. 이 모든걸 생각 못할 정도로 맥길 왕이 순진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두 왕족 사이에 가족의 연이 생겼다. 특히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가 갖는 의미를 쉽게 간과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두 왕족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가 장성해 왕이 된다면 언젠가 양국이 통일 될 가능성도 있었고 더불어 하이랜드 경계선도 더 이상 의미가 무색해질 것이다. 또한 영토는 단일 국가의 통치하에 더욱 번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맥길 왕의 염원이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모든 후손들을 위한 염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링 안의 대륙이 강하게 결속해 링 대륙 가장자리에 있는 무리들에 맞서 캐니언 협곡이 건재하도록 방어해야 했다. 두 왕국이 결속하지 않는다면 링 대륙 내부의 취약점만 드러내는 꼴 이였다.

“건배.”

맥길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수백 명의 시중들이 일제히 쫓아 일어나 포도주 잔을 들어 올렸다.

“첫 째 공주의 혼례를 위해! 서부 왕국과 동부 왕국의 결속을 위해! 링 대륙의 평화를 위해!”

“옳소, 옳소!”

모두가 입을 모아 합창했다. 모두가 잔을 비웠고 연회장은 또다시 웃음과 축제의 즐거움으로 활기가 돌았다.

맥길 왕은 다시 착석해 나머지 자식들을 찾아 연회실을 둘러봤다. 예상대로 고드프리 왕자는 양 손에 술잔을 쥐고, 양 팔에 한 명씩 여자를 끼고, 사기꾼 같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오늘의 피로연은 고드프리 왕자가 자진해서 참석한 몇 안 되는 왕실 행사였다. 개리스 왕자는 펄스 가까이에 앉아 그와 귓속말을 나눴다. 개리스 왕자의 눈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걸로 보아 뭔가 음모를 꾸미는 게 분명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왕은 속이 불편해져 고개를 돌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 가장 어린 리스 왕자가 있었다. 새로 사귄 친구, 토르와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왕은 이미 토르가 자식처럼 여겨졌다. 덕분에 막내 왕자가 토르와 빠르게 가까워지는 걸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그웬돌린 공주를 찾아봤다. 공주는 한쪽에서 시녀들과 둘러앉아 웃어대고 있었다. 왕은 공주의 시선을 쫓았고 공주가 주시하는 사람이 토르임을 확인했다. 꽤 오랫동안 공주를 관찰한 결과 왕은 공주가 토르에게 푹 빠진걸 알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불길했다. 왕비를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요.”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

돌아보니 아르곤이 피로연을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소? 왕국의 평화는 지속되겠소?”

“평화는 절대 한곳에 머무르지 않죠. 썰물처럼 빠지고 파도처럼 출렁이죠. 눈 앞에 보이는 건 평화의 겉모습일 뿐이죠. 평화의 한 단면에 불가해요. 폐하께서는 수백 년간 이어진 대립관계를 억지 평화로 덮으려 하고 계시죠. 수백 년 동안 흘려온 피를 잊지 마세요. 영혼들이 복수를 울부짖고 있어요. 결혼식 하나로 달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오?”

맥길 왕은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불안했다. 아르곤과 함께 있을 때 종종 드는 감정이었다.

아르곤이 고개를 돌려 왕의 눈을 주시했다. 너무나 강력한 눈빛에 왕은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전쟁이 곧 닥쳐요. 동부왕국이 공격해올 겁니다. 대비해두세요. 눈 앞에 앉아있는 동부왕국의 신하들은 머지않아 사력을 다해 폐하의 식솔들을 죽이려 할 거에요.”

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들에게 공주를 보낸 게 잘못된 결정이란 말인가?”

아르곤은 잠시 침묵에 잠겨있다 입을 열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아르곤이 고개를 돌리자 맥길 왕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마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묻고 싶은 질문이 수천 개가 넘었지만 왕은 자신이 답을 들을 준비가 되기 전엔 마법사로부터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하리란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대신에 왕은 아르곤의 시선을 살펴 그가 그웬돌린 공주와 토르를 주시하는 걸 확인했다.

“저 두 사람이 맺어지는가?”

“아마도요. 허나 아직도 많은 것들이 결정되지 않은 채로 있군요.”

“수수께끼 같은 소리만 하는군.”

아르곤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왕은 그가 더 이상은 얘기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오늘 마상장에서 일어난 일을 보았소? 저 아이의 일을?”

“이미 오래 전에 예상했던 일이지요.”

“어떻게 생각하오? 저 아이가 가진 힘은 무엇이오? 자네와 같은 존재인가?”

아르곤은 다시 고개를 돌려 왕의 눈을 주시했다. 역시나 너무 강렬해 맥길 왕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해버렸다.

“저 아이는 저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놀란 왕이 다시 아르곤의 눈을 쳐다봤다. 아르곤이 이렇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훨씬 강하다고? 자네보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네는 왕의 마법사야. 이 땅에 자네보다 강한 존재는 없지 않나.”

아르곤이 또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힘이란 일관적인 모습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지요. 저 아이는 폐하께서 상상하시는 것 이상의 힘을 지녔어요. 저 아이조차 상상도 못하는 힘이죠. 저 아이는 자신이 누군지도 알지 못하죠. 어디서 왔는지 조차요.”

아르곤이 고개를 돌려 왕과 눈을 맞추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시죠.”

왕이 영문을 모른 채 아르곤을 바라봤다.

“짐이? 말을 해주게, 알아야겠네.”

아르곤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가 느끼는 감정을 따르세요. 그 감정이 진실입니다.”

“저 아이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겁니다. 또 훌륭한 전사도 되겠지요. 혼자 힘으로 왕국들을 이끌 겁니다. 폐하의 왕국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훌륭하게요. 또한 폐하보다 훨씬 훌륭한 왕이 될 거에요. 그게 저 아이의 운명이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왕은 통제할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왕은 시선을 옮겨 토르를 관찰했다. 토르는 왕의 부대 테이블에서 리스 왕자와 나란히 앉아 순진하게 웃고 있었다. 도대체 아르곤의 말이 가능하긴 한 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토르는 이제서야 겨우 왕의 부대에 합류한 어린 사내였다. 혹시 아르곤이 틀린 게 아닌가 왕은 잠시 의구심을 품었다.

“왜 짐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오?”

아르곤이 왕의 두 눈을 주시했다.

“이젠 폐하께서 준비하실 차례이기 때문이죠. 저 아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모든 게 최고로 갖춰줘야 해요. 그건 폐하의 몫입니다.”

“짐의 몫? 저 아이의 아비는 무얼 하고?”

“아비라고 하셨나요?” 아르곤이 되물었다.

제 11장

어지러운 상태로 눈을 뜬 토르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바닥 위에 짚 더미를 깔고 누워있었고 얼굴은 옆으로 눌린 채 양 팔은 머리 위로 아무렇게나 뻗어있었다. 몸을 조금 일으켜 흘린 침을 닦은 순간 눈 뒤에서부터 극심한 두통이 급습했다. 이렇게 끔찍한 두통은 처음이었다.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폐하가 베푼 연회와 생애 첫 음주가 생각났다. 방이 빙글빙글 돌았다. 갈증으로 목이 바짝 탔고 두 번 다신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디에 있는 건지 알고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주변이 사람들로 가득했고 모두 쌓아 올린 짚 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코 고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반대편을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리스 왕자가 골아 떨어져 있었다. 토르가 있는 곳은 막사였다. 왕의 부대 부대원들을 위해 마련된 막사였다. 주변엔 모두 토르 또래의 부대원들이었다. 대략 50명은 족히 돼 보였다.

새벽에 리스 왕자가 토르를 이곳으로 데려온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오자마자 짚 더미 위로 쓰러졌던 것이다. 이른 아침이었고 햇살이 창으로 쏟아져 내렸다. 깨어나 있는 사람은 토르 뿐이었다. 옷을 입은 채로 잠들었었다. 토르는 손을 뻗어 기름진 머리를 쓸었다. 몸을 씻고 싶었지만 샤워장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물 한잔만 마셨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났다. 허기가 졌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막사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쯤인지도 알 수 없었고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궁금했으며 부대원이 정확히 무얼 하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행복했다. 휘황찬란한 하루를 보냈고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리스 왕자와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 것도 모자라 자신을 주시하는 그웬돌린 공주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공주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용기가 사라졌다. 생각하니 후회가 막심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만약 단 둘만 있었다면 충분히 용기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만날 기회가 있긴 한 것일까?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누군가 막사 문을 세차게 두드렸고 얼마 있지 않아 나무문이 쾅 하고 열리며 빛이 들어왔다.

“기립하라, 부대원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12명의 실버 대원들이 막사 안으로 행군했다. 입고 있는 갑옷에서 찰랑찰랑 소리가 날 정도로 나무 벽을 금속 막대기로 두드려댔다. 토르를 비롯한 모든 부대원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사령관은 화가 잔뜩 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젯밤 원형경기장에서 토르와 마주했던 사령관이었다. 땅딸막한 체구에 코 위에 흉터가 있는 대머리. 리스 왕자가 사령관의 이름이 콜크라고 살짝 일어줬다.

콜크 사령관은 토르에게 화가 잔뜩 난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은 토르를 지목하고 있었다.

“거기, 부대원!”

사령관이 소리쳤다.

“기립하라고 했다!”

토르는 혼란스러웠다. 이미 기립해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대로 기립했습니다, 주군,”

사령관은 가까이 다가서더니 손가락 하나로 토르의 얼굴을 쭉 밀었다. 모두가 토르를 쳐다보는 가운데 토르는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 다신 상관에게 말대꾸하지 말라!”

사령관이 꾸짖었다.

토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사령관은 토르를 지나쳤다. 방안을 지나다니며 부대원들을 한 명씩 훈계했다. 아직도 잠이 덜 깬 부대원들은 사령관의 발에 갈비뼈를 사정없이 채였다.

“걱정 안 해도 돼.”

안심하라는 말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리스 왕자가 옆에 서 있었다.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원래 이런 식이야. 우릴 길들이는 거야.”

“그렇지만 왕자님껜 안 그러잖아요.”

“물론 그렇긴 해, 내게 손을 못 대지. 난 왕자잖아. 그렇지만 내게도 다른 부대원들 대하듯 함부로 대해. 군기를 잡는 거야. 이렇게 하면 군기가 바짝 들거라 생각하나 봐.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마.”

토르와 리스 왕자를 비롯한 모든 부대원들이 막사 밖으로 행군했다. 밖으로 나서자 거침없는 땡볕이 토르를 덮쳤다. 얼굴이 일그러진 토르는 손으로 햇빛을 가렸다. 순간 현기증이 밀려와 몸을 가눌 수 없었고 곧장 뒤돌아 허리를 숙이고 구역질을 했다.

주변에 있던 부대원들이 히죽히죽 비웃었다. 실버 대원이 토르를 거침없이 밀었고 토르는 앞으로 비틀거리며 다시 대열에 합류했다. 토르는 손으로 입을 닦았다. 이렇게 거북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토르의 옆에서 리스 왕자가 미소를 지었다.

“어제 저녁 힘들었지, 안 그래?”

왕자는 미소를 가득 짓고선 팔꿈치로 토르의 갈비뼈를 살짝 건드렸다.

“두 잔째 이후론 내가 마시지 말라고 말렸잖아.”

땡볕에 눈이 부시자 토르는 더욱 메스꺼웠다. 오늘따라 유난히 햇볕이 강했다. 벌써부터 무더웠고 가죽옷 안으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리스 왕자가 말렸던 기억을 떠올리려 했지만 토르는 어젯밤 일이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어제 절 말리신 기억이 없어요.”

왕자는 더욱 크게 미소를 지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네가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계속 마셔댔으니까 기억이 안 나는 거야. 게다가 내 누나한테 말을 걸어 보겠다는 어설픈 시도도 그렇고. 정말 엄청 측은했어. 내 생에 여자 앞에서 그렇게 겁을 집어먹은 사람은 처음이었다니까.”

얼굴이 빨개진 토르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모든 게 희미하고 어렴풋한 기억뿐이었다.

“기분 나쁘지 않으셨기 바래요, 공주님 일이요.”

“기분 나쁘지 않아. 만약 누나가 널 선택한다면 난 정말 기쁠 거야.”

부대원들을 언덕 위로 행군을 이어갔다. 덕분에 토르와 리스 왕자도 속도를 높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태양은 더욱 강렬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충고는 해 줘야겠어. 왕국의 모든 남자들이 누나를 마음에 두고 있어. 누나가 널 선택할 확률은…… 음, 희박하다고 해 두자.”

왕실의 푸른 언덕 위로 행군이 이어졌다. 토르는 마음이 놓였다. 리스 왕자로부터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이상하게도 토르는 계속해서 리스 왕자에게 형제애를 느꼈다. 계속되는 행군 속에서 토르의 친형들이 토르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그 중 한 명이 몸을 돌려 토르를 노려보고 다른 형제를 쿡 찔렀다. 이번엔 그 형이 토르를 돌아보며 조롱의 미소를 보냈다. 이들은 토르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토르에게 친절한 말 한마디 건넬 의사가 없었다. 토르 또한 형들로부터 일말의 따뜻함도 기대하지 않았다.

“열을 맞춰라, 부대원들! 당장!”

고개를 들어보니 몇몇 실버 대원들이 50여명의 부대원들을 이열 종대로 세우고 있었다. 대원 한 명이 앞으로 다가와 대나무로 토르 앞 부대원의 등을 세게 내리쳤고 부대원은 훌쩍거리며 좀 더 안쪽으로 줄을 섰다. 얼마 후 부대원들은 모두 반듯한 두 줄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전장으로 행군할 때는 모두 하나의 움직임이 돼야 한다!”

콜크 사령관이 행군 대열 옆으로 발을 맞추며 외쳤다.

“이곳은 너희들 고향 땅이 아니다. 너희들은 전장에 나서는 길이다!”

토르는 왕자 옆에서 행군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제 마신 술로 속이 좋지 않았고 아침 식사는 언제쯤인지, 물은 언제쯤 마실 수 있을지 애만 태웠다. 다시 한번 어젯밤 술을 마신 자신이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언덕의 정상에 도착한 뒤 다시 하강해 석조 원형 입구를 지나 마침내 원형 경기장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원형 석조 문을 지나고 나서야 부대원들은 원형 경기장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왕의 부대 훈련장이었다.

눈 앞엔 창 던지기, 활 쏘기, 돌 던지기 연습을 위한 온갖 종류의 과녁이 마련돼 있었고 검 연습용 짚 더미도 보였다. 눈 앞의 장면에 토르는 설렜다. 어서 달려가 무기들을 다뤄보고 훈련을 받고 싶었다.

훈련장을 향해 걸어가는 토르의 옆구리를 누군가가 뒤에서 팔꿈치로 찔렀다. 돌아보니 토르 또래이거나 토르보다 어려 보이는 여섯 명의 부대원들이 행렬 대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토르는 리스 왕자와 떨어져 훈련장 반대쪽 운동장으로 향해야 했다.

“훈련을 받을 거라 생각했나?”

콜크 사령관이 조롱하듯 말을 건넸다. 토르의 무리는 행렬 대열과 분리되어 과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오늘 네 할 일은 말을 돌보는 것이다.”

토르는 고개를 들어 어디로 가는지 살폈다. 저 멀리에서 말 몇 마리가 뛰고 있었다. 사령관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토르를 내려봤다.

“다른 부대원들이 창을 던지고 검을 휘두르는 동안, 너희들은 말을 돌보고 배설물을 치워라. 이것이 이제 막 들어온 너희들을 위한 일이다. 왕의 부대 부대원이 된 걸 환영한다.”

토르는 낙담했다.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네가 특별한 것 같지?”

사령관이 뒤에서 쫓아와 그의 얼굴을 토르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토르는 사령관이 자신을 길들이려 한다는 것 알 수 있었다.

“폐하와 왕자님께서 널 마음에 들어 하신다고 해서 내가 눈 하나 깜빡 할 줄 알아. 넌 내 담당이야. 알겠어? 네가 마상장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건 상관없어. 넌 그저 다른 부대원들하고 똑같아. 내 말 알아 듣겠나?”

꿀꺽하고 침을 넘겼다. 토르는 이제 막 길고도 험한 훈련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사령관이 다른 부대원을 괴롭히려 자리를 뜨자 토르 앞에 있던 납작한 코에 키가 작은 부대원이 토르를 비웃어댔다.

“넌 여기 있을 자격 없어.”

작은 부대원이 말을 건넸다.

“넌 부정행위로 여기 들어온 거야. 선발되지도 못했잖아. 넌 우리랑 달라. 우리 모두 다 네가 못마땅하다고.”

그 옆에 서 있던 부대원도 토르를 비웃었다.

“네가 여기서 제 발로 나가도록 최선을 다해줄게. 들어오는 건 쉬웠지만 머무는 건 그렇지 않을 거야.”

이들의 적대감에 토르는 흠칫 놀랐다. 벌써부터 이렇게 많은 적이 생겼다는 게 믿기 힘들었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미움을 받는지 궁금했다. 토르가 원한 건 단지 왕의 부대에 합류하는 것뿐이었다.

“너희들이나 잘 해.”

누군가가 부대원들에게 말을 건넸다.

쳐다보니 큰 키에 삐쩍 마른 빨간 머리 소년이었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초록 눈을 작게 뜬 소년이 토르의 편을 들어줬다.

“어서 이리 와서 너희들 삽질이나 해. 너희들도 특별한 거 없잖아. 다른데 가서 시비 걸어.”

“남의 일에 신경 꺼, 종놈아. 아니면 너도 괴롭힘 당할 줄 알아.”

토르를 비난하던 부대원 한 명이 맞받아쳤다.

“해봐.”

빨간 머리 소년은 끄떡도 안 했다.

“내 허락 없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콜크 사령관이 저 멀리서 부대원 한 명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그 덕에 토르 앞에 서있던 두 부대원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토르는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도움을 준 빨간 머리 소년이 너무 고마웠다.

“고마워.”

빨간 머리 소년은 토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난 오코너야. 악수라도 나누고 싶은데 그러면 사령관님이 쥐어박을지도 몰라. 악수 대신 이걸로 대신하자.”

오코너가 입을 크게 벌리고 미소를 지었고 토르는 그런 오코너가 마음에 들었다.

“쟤들 신경 쓰지마, 쟤들도 단지 겁먹어서 그런 거야. 여기 있는 다른 애들처럼.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앞으로 우리한테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정확히 모르거든.”

토르의 무리는 운동장 끝에 도착했다. 뛰어다니는 말을 세어보니 총 여섯 필이었다.

“고삐를 잡아라!”

사령관이 명령했다.

“고삐를 꽉 잡고 말들이 멈출 때까지 경기장을 돌아. 당장 실시한다!”

토르는 앞으로 나서 말의 고삐를 잡았고 순간 말이 뒤로 물러서며 발을 굴렀다. 자칫하면 말에 채일뻔한 상황이었다. 깜짝 놀란 토르는 뒤로 비틀거렸고 나머지 부대원들이 그를 보고 웃어댔다. 콜크 사령관이 뒤에서 토르를 세게 쥐어박았다. 토르는 사령관을 똑같이 때려주고 싶었다.

“넌 왕의 부대 부대원이다. 절대 후퇴란 없다. 누구로부터도.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그 어떤 짐승으로부터도. 당장 고삐를 잡아라!”

토르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말에게 다가가 날뛰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이번에는 말의 고삐를 놓치지 않고 잘 쥐었고 각자 말을 끌고 가는 부대원의 대열에 합류해 경기장을 돌기 시작했다. 말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저항했지만 토르도 고삐를 잡고 포기하지 않았다.

“점차 나아질 거야, 믿어봐.”

토르의 뒤로 오코너가 웃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말들이 오히려 우릴 길들이려 하는 거야, 알지?”

난데없이 토르의 말이 갑자기 멈춰 섰다. 아무리 세게 고삐를 잡아 끌어도 꿈쩍도 안 했다. 그러더니 어디선가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 말은 도저히 믿기 힘들 만큼 많은 배설물이 배출하고 있었다. 끝도 없이 계속 나왔다.

누군가 토르의 옆구리에 작은 삽을 내밀었다. 돌아보니 콜크 사령관이 웃으면서 토르를 내려보고 있었다.

“치워라!”

제 12장

개리스 왕자는 붐비는 시장에 서 있었다. 한낮의 태양 볕에도 불구하고 외투를 착용했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신분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왕자는 왕국 내부에서도 특별히 이곳을 꺼려했다. 복잡한 골목길에 사람냄새와 하층민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왕자의 주변에서는 사람들의 흥정이 오갔고, 거래가 이어졌으며, 서로 이득을 보겠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왕자는 골목 노점 앞에서 과일을 고르는 모양새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펄스가 서 있었다. 어두운 골몰길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펄스는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중이었다.

개리스 왕자는 등을 돌려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한편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펄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펄스는 왕자에게 독약을 파는 장사치 이야기를 귀띔해주었다. 개리스 왕자가 세운 계략을 위해서는 강하고 확실한 독약이 절실했다. 한번에 끝낼 수 있는 독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왕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릴게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독은 일반 약품 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왕자는 펄스에게 이 임무를 맡겼고 펄스는 암시장을 알아본 뒤 왕자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곳까지 이리저리 길을 안내한 펄스는 골목길 끝자락에서 행실이 의심쩍은 한 사내와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사실 직접 나서 거래하길 원했다. 직접 나서 순조롭게 일을 진행하고, 행여 사기를 당하거나 가짜 독약을 거래하는 일이 없게끔 하고 싶었다. 게다가 왕자는 아직 펄스의 능력을 완전히 신임하지 못했다. 이런 일들은 직접 나서 해결하는 게 최선이었다.

30분을 기다리고 나서야 장사치가 나타났다. 개리스 왕자는 북적거리는 시장 통에서 사람들 속에 몸을 숨기고 신분이 드러나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만약 들통난다면 눈앞의 길을 따라 골목길로 빠질 계획이었다. 그렇게 유유히 사라진다면 아무도 그를 쫓아오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약병은 어디 있어?”

왕자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펄스가 장사꾼에게 물었다.

왕자는 몸을 약간 돌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조심하며 외투 사이로 몰래 훔쳐봤다. 펄스의 맞은편에 선 남자는 악마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단정하지 못한 매무새에 삐쩍 마른 몸, 움푹 페인 양 볼과 크고 검은 눈이 마치 쥐를 보는 것 같았다. 그자의 눈은 미동도 없이 펄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돈은 어디 있소?”

펄스는 주로 일을 망치는 데 능했기에 왕자는 이번만은 펄스가 실수 없이 이 일을 잘 처리하길 바랬다.

“약병을 주면 돈을 줄게.”

펄스가 굽히지 않았다.

‘좋아,’ 왕자는 펄스의 대답에 흡족했다.

“우선 약속한 금액의 절반을 주시오, 그럼 약병이 이디 있는지 말해 드리지.”

“어디 있는지?”

놀란 펄스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약을 준다고 했잖아.”

“약을 준다고 했소, 암 그랬지. 그렇지만 내가 약병을 가지고 올 거라고는 안 했잖소. 날 바보로 아시오? 주변이 온통 첩자인데. 당신 의도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큰 일을 꾸미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면 왜 독이 든 약병을 사려 하겠소?”

펄스가 멈칫했다. 왕자의 눈에 당황한 펄스가 보였다.

왕자는 이내 동전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펄스가 지갑에서 금화를 꺼내 남자의 손에 쥐어줘 버렸다.

왕자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혹시 남자에게 속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점점 커졌다.

“블랙우드로 가시오.”

드디어 남자가 입을 열었다.

“5000미터 정도 간 후에 갈림길이 나오면 언덕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시오. 언덕 위에 또 다른 갈림길이 있소. 왼쪽 길을 따르시오. 아주 어두운 길을 계속해서 가다 보면 작은 빈터에 도착할 것이오. 거기 마녀의 오두막이 있소. 당신이 원하는 약병을 들고 마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모자 밑으로 지켜보던 왕자의 눈에 자리를 뜨려는 펄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남자는 갑자기 손을 뻗어 펄스의 상의를 움켜 쥐었다.

“돈.”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나머지 돈을 주시오.”

펄스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를 본 왕자는 펄스에게 이 일을 맡긴 걸 끝내 후회했다. 겁에 질린 펄스의 모습에 남자는 좀 더 이득을 챙기려 들게 불 보듯 뻔했다. 펄스는 이런 일에 능숙하지 않았다.

“달라는 데로 돈을 다 줬잖아.”

펄스가 고조된 목소리로 항의했다. 여자 같은 목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더 대담해졌다.

남자가 씩 웃었다, 악마가 따로 없었다.

“더 줘야겠는걸.”

겁에 질려 불안한 펄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돌려 왕자를 쳐다봤다.

왕자는 성급히 몸을 돌렸다. 때맞춰 시선을 피했기를 바랬다. 남자가 자신을 보지 못했기를 기도했다. 펄스는 어쩜 저리 어리석은 것인가? 왕자는 이 일로 펄스를 버리게 되진 않을까 스스로 염려했다.

기다리는 내내 왕자의 심장이 요동쳤다. 초초한 손으로는 과일을 만지며 한창 과일을 고르는 척 했다. 등 뒤로는 계속 침묵이 이어졌기에 왕자로서는 일이 완전히 어긋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절대 그 남자를 이쪽으로 오게 해선 안돼,’ 왕자는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뭐든지 할게. 계획을 철수할게.’

누군가가 뒤에서 왕자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이에 왕자는 뒤를 돌아봤다.

장사꾼의 커다랗고 영혼 없는 검은 눈동자가 왕자를 마주했다.

“일행이 있다는 말은 안 했잖소, 첩자인가?”

남자의 어조가 사나웠다.

왕자가 막을 새도 없이 남자는 팔을 뻗어 왕자의 모자를 벗겼다. 왕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남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왕자님.”

남자가 비틀거렸다.

“여기서 무얼 하시는 거죠?”

이내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뭔가를 짐작하는 듯 했다. 남자의 질문에 남자는 스스로 답을 찾은 듯 만족스러운 웃음을 살짝 지었다. 남자는 왕자의 계략을 한 순간에 꿰뚫었다. 왕자의 바램과 다르게 남자는 너무 영리했다.

“이제 알겠어요, 이 약은 왕자님께서 원하시는 거죠, 그렇죠? 누군가를 독살하시려고 하는 군요, 그렇죠? 근데 누구를? 음, 이게 관건이군요……”

불안해진 왕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남자의 눈치가 너무 빨랐다. 그리고 상황은 이미 너무 멀리까지 갔다. 왕자의 모든 음모가 이 남자 앞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려던 참이었다. 펄스가 모든 것을 망쳐놨다. 만약 이 남자가 왕자를 밀고한다면, 왕자는 처형될 것이다.

왕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다가가 외투에서 단검을 꺼내 남자의 가슴에 꽂았다. 남자의 숨통이 막혔다.

지나가는 그 누구도 이 장면을 목격하게 해선 안됐다. 왕자는 남자의 옷을 잡고 가까이 잡아 당겼다. 얼굴이 거의 맞닿았고 덕분에 악취가 가득한 남자의 숨을 참아야 했다. 왕자는 나머지 손으로 남자의 입을 막아 비명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신경 썼다. 남자의 뜨거운 피가 왕자의 손바닥에 뚝뚝 흘러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가까이 다가온 펄스가 두려움에 울부짖었다.

왕자는 거의 일분 가까이 남자를 붙들고 있었고 마침내 남자의 팔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왕자는 그제서야 손을 놨고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주위를 둘러보며 목격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그 누구도 시장의 어두운 골목길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왕자는 남자의 옷을 벗겨 얼굴을 덮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펄스가 여자아이처럼 말을 반복하며 병적으로 울부짖었고 벌벌 떨며 왕자에게 다가갔다.

“입 닥치고 빨리 여길 떠나.”

펄스가 뒤를 돌아 뛰어갔다.

왕자도 자리를 피하려다 다시 멈춰 뒤를 돌아봤다. 한가지 더 할 일이 있었다. 왕자는 손을 뻗어 죽은 남자의 손에서 금화를 빼내 자신의 허리 춤에 금화를 챙겨 넣었다.

남자에겐 더 이상 금화가 쓸모 없었다.

제13장

개리스 왕자는 신속히 숲길을 걸었다. 뒤로는 펄스가 쫓아오고 있었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옷에 붙은 모자를 머리 위로 뒤집어 썼다. 자신이 가장 우려했던 상황에 처해진 걸 용납하기 힘들었다. 한 남자가 죽었다. 단서가 남은 것이다. 죽은 남자는 자신이 거래한 사람이 왕자라는걸 알았다. 죽은 남자와의 거래에 펄스는 더욱 신중했어야 했다. 단서의 끈을 추적해나가면 개리스 왕자가 들통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미안해.”

펄스가 왕자를 따라잡기 위해 속도를 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자는 두 배 더 빠른 걸음으로 펄스를 무시했다.

“정말 멍청하고 나약해 빠졌어, 내가 있는 곳을 쳐다보면 어떻게 해.”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돈을 더 달라고 나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펄스의 말이 옳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그 남자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돼지에 불과했고 거래의 규칙을 마음대로 바꿨으니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왕자는 그 남자에게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살해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길 기도했다. 최종적으로 필요한 건 알리바이였다. 왕의 암살되면 대대적인 사인규명이 벌어질 게 뻔했다. 왕자는 아주 작은 단서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의심의 여지를 심어 줄만한 건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블랙우드 숲에 당도했다. 한여름 태양이 내리쬐는데도 불구하고 숲 속은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높게 뻗은 유칼립투스 나무가 빈틈없이 빛을 차단했고 캄캄한 어둠이 왕자의 심경을 대변했다. 숲이 영 내키진 않았지만 죽은 남자가 가르쳐준 대로 구불구불한 길을 쭉 따라 내려갔다. 죽은 남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길 바랬다. 이 모든 게 그저 속임수일수도 있었다. 또는 죽은 남자의 함정에 빠져 그가 미리 심어 둔 일행들에게 돈을 더 뜯기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왕자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펄스를 믿는 게 아니었다. 직접 나섰어야 했다. 평소처럼 말이다.

“이 길 끝에 마녀가 있길 바래야 할거야. 마녀한테 독약이 없기만 해봐.”

왕자가 빈정거렸다.

남자가 일러준 대로 갈림길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좁은 길을 따라 갔다. 다행히 남자의 말대로 갈림길이 나왔고 이에 왕자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갈림길의 오른쪽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또 다른 갈림길이 보였다. 남자의 말이 사실이었다. 두 사람 앞에는 상상을 초월한 암흑의 나무숲이 있었다. 숲 속 나무들은 모두 믿을 수 없을 만큼 두꺼웠고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왕자는 나무숲으로 걸어 들어갔고 발을 들인 순간부터 등에서 한기를 느꼈다. 숨을 쉴 때마다 악마의 기운이 전해졌다. 아직 오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차라리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찰나, 길이 끝나고 작은 공터가 보였다. 공터 위로 아주 희미한 햇살이 나무그늘 사이로 내리쬐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돌로 지은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마녀의 오두막이었다.

왕자는 심장이 떨렸다. 공터로 몸을 이끌며 주변을 살폈다. 그 누구의 목격도 원치 않았고 혹시 함정이 아닌가 확인했다.

“봐봐, 그 남자가 거짓말 한 게 아니야.”

흥분된 어조로 펄스가 말을 건넸다.

“그래서 어쩌라고.”

왕자가 꾸짖었다.

“밖에서 망을 봐. 누구라도 얼씬거리면 문을 두르려. 그리고 입도 뻥끗하지 말고 있어.”

왕자는 눈 앞의 작은 원형 나무 문을 두드리는 대신 철 손잡이를 밀어 문을 열었다. 고개를 쭉 내밀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오두막 안은 어두웠다. 집 안을 밝혀주는 건 양초 잔해들뿐이었다. 내부는 방 하나가 전부였다. 창문이라고는 없었고 무거운 기운이 집안을 메웠다. 그곳의 고요함이 너무 무거워 숨이 막혔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악마와 한 집에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소름이 돋았다.

어둠 속에서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내 소리가 들렸다.

왕자의 눈앞에 절름거리며 나타난 건 늙은 마녀였다. 주름이 자글자글 했고 등이 굽어있었다. 마녀는 초를 위로 올렸다. 마녀의 얼굴을 뒤덮은 주름과 검버섯이 선명해졌다. 마녀는 수백 살은 더 들어 보였다. 오두막을 에워싸고 있는 구불구불한 나무들보다 더 오래 산 것 같았다.

“암흑 속에서도 모자를 뒤집어 썼구나. 의도가 불순해.”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마녀가 입을 열었다. 나무가 갈라지는듯한 소리였다.

“독약을 가지러 왔소.”

왕자가 서둘러 말했다. 침착하고 당당해 보이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셀드레이크 뿌리,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들었소.”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는 낄낄거리는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작은 방안 가득 울렸다.

“내가 그걸 가지고 있던 말던 그게 문제가 아니지. 문제는 바로 왜 당신이 그걸 찾느냐는 거겠지?”

변명거리를 찾던 왕자의 심장이 빨라졌다.

“당신이 왜 그걸 알아야 하는데?”

“네가 누굴 죽일지 알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당신은 신경 꺼. 돈은 여기 가져왔어.”

왕자는 허리띠에서 금화가 든 주머니를 하나 꺼낸 뒤 다시 남자를 죽이고 되찾은 금화 주머니를 꺼내 주머니 두 개를 나무 탁자 위에 던졌다. 쨍그랑 하고 동전이 부딪히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이걸로 마녀가 만족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마녀에게서 독약을 건네 받고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마녀가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를 뻗자 구부러진 손톱이 드러났다. 마녀는 들어올린 주머니를 유심히 살폈다. 왕자는 마녀가 더 많은 금화를 요구하지 않길 바라며 숨을 참고 있었다.

“이거면 내 입은 충분히 막겠군.”

마녀는 뒤를 돌아 어둠 속으로 절룩거리며 사라졌다. 거품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둔 촛불 덕에 마녀가 작은 유리병에 액체를 섞는 모습이 보였다. 유리병 속에 거품이 일어났고 마녀는 마개를 닫았다. 기다리는 내내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고 불안감이 더해졌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걱정거리들이 왕자를 엄습했다. 만약 발각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발각된다면? 만약 마녀가 잘못된 독약을 준다면? 만약 마녀가 누군가에게 이 일을 발설한다면? 마녀가 자신의 신분을 눈치 챘다면? 왕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뿐이었다.

왕자는 이 모든 일에 점점 더 의구심을 느꼈다. 누군가를 암살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이제서야 깨달았다.

영원 같은 침묵이 한참이나 흐른 뒤, 마녀가 다시 나타났다. 마녀가 건네준 유리병은 너무 작아 한 손으로 충분히 감싸고도 남았다. 마녀는 뒤로 물러섰다.

“왜이리 작지? 이걸로 일을 도모할 수 있겠소?”

마녀가 미소를 지었다.

“아주 소량만으로도 목숨이 끊긴다는 사실에 감탄하게 될 거네.”

왕자는 뒤돌아 문으로 걸어갔다. 순간 등뒤로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마녀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뒤따라 왔는지 알 수 없어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왕자는 미동도 없이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차마 너무 무서워 돌아볼 수가 없었다.

마녀는 왕자의 몸을 돌려 가까이 다가갔다. 마녀에게서 흉측한 냄새가 풍겼다. 마녀는 갑자기 양 손을 들어 왕자의 양 볼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말라 비틀어진 마녀의 입술이 왕자의 입술을 힘껏 눌렀다.

왕자는 완강히 반항했다. 생애 가장 역겨운 순간이었다. 마녀의 입술은 도마뱀 같았고 왕자의 혀를 누르는 마녀의 혀는 파충류의 혀와 다를 게 없었다. 마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마녀는 왕자의 얼굴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끝내 왕자는 뒤로 물러섰다. 손으로 입을 닦고 다시 닦은 손을 옷에 문질렀다. 마녀가 몸을 구부리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살인은 처음이 가장 어렵지, 그 다음부턴 한결 수월할거야.”

*

왕자는 서둘러 오두막을 벗어나 빈터로 달려 나왔다. 그곳에선 펄스가 왕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펄스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마치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 같잖아. 마녀가 해치기라도 했어?”

왕자는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며 반복해서 입을 닦아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뿐이었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자, 당장!”

블랙우드 숲으로 향하려 하자 갑자기 먹구름이 모여들어 해를 가렸다. 화창한 날씨가 급격히 어둡고 추워졌다. 이렇게 순식간에 두껍고 시커먼 먹구름 층이 드리워진 건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예사롭지 않았다. 여름날 쏟아지는 차디찬 비를 속수무책으로 맞으며 걸어가던 왕자는 마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없어 걱정이 앞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녀의 입맞춤에 악령이 홀린 것 같았다. 저주를 받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오두막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하고 싶지 않아. 두 번 다시는 오늘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은 서둘러 좁을 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갔고 왕실로 향하는 숲길에 들어섰다. 이제서야 개리스 왕자의 기분이 차츰 나아졌다. 그러나 오늘 벌어진 일들을 마음속에서 지우려고 마음먹던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사내 여러 명이 왕자와 펄스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개리스 왕자는 두 눈을 의심했다.

술주정뱅이 동생 고드프리 왕자가 보였다. 실실 거리며 왕자에게 걸어오고 있었고 그의 주변으로 골칫거리 친구 두 명과 고드프리 왕자의 친구들 중 가장 비열한 헨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왜 그 많은 시간 중에, 그 많은 장소 중에 하필이면 이 시간에 이 숲 앞에서 마주쳤단 말인가. 왕자의 계획에 저주가 내려진 것 같았다.

개리스 왕자는 뒤로 돌아 머리 위로 모자를 덮었다. 평소보다 두 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정체가 탄로나지 않길 기도했다.

“개리스 형?”

달리 방도가 없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모자를 벗었다. 몸을 뒤로 돌려 고드프리 왕자와 눈을 맞췄다. 고드프리 왕자가 흥겨움에 빙그르르 돌며 개리스 왕자 앞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고드프리 왕자가 물었다.

개리스 왕자는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이내 다시 닫고 말았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말을 잃었다.

“산책 갔다 왔어요.”

펄스가 대신 대답했고 덕분에 개리스 왕자가 위기를 면했다.

“산책, 둘이서?”

고드프리 왕자의 친구 한 명이 여자 목소리로 질문하며 펄스를 조롱했다. 나머지 친구들이 다같이 웃어댔다. 개리스 왕자는 고드프리 왕자와 그의 친구들이 평소 그의 성적 취향을 비판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화제를 전화해야 했다. 고드프리 왕자 일행이 왕자가 숲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하는걸 바라지 않았다.

“그러는 넌 뭐하고 있었어?”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개리스 왕자가 물었다.

 

“사우스우드에 선술집 하나가 신규 개점했거든, 우리가 행차 한번 해 주셨지. 왕국에서 술 맛이 가장 끝내준다고. 좀 줄까?”

고드프리 왕자의 손에 나무통이 하나 들려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고드프리 왕자의 생각을 분산시켜야 했고 그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화제를 다시 전환해 그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네가 이렇게 하루 종일 술 마시고 다닌 거 폐하께서 아시면 노여워하실 거야. 당장 술통 버리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성공이었다. 고드프리 왕자가 눈을 번뜩였고 확실히 개리스 왕자에 대해선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오직 자신의 부자관계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언제부터 형이 아버지 걱정을 대신 해줬어?”

이걸로 충분했다. 술주정뱅이와 더 이상 말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갔고 고드프리 왕자를 교란시켰다. 이제 자신이 왜 이곳에서 고드프리 왕자 일행과 마주치게 됐는지는 더 이상 개리스 왕자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개리스 왕자는 뒤를 돌아 신속히 가던 길을 걸어갔다. 왕자의 뒤로는 조롱 가득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개리스 왕자는 관심을 껐다. 머지않아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라 여겼다.